<문화사랑방>사전에도 없는 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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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중학교 다닐 때 어떤 영어단어 하나를 외우려고 무진 애를 썼던 기억이 난다.자그마치 29개의 알파벳으로 이루어져 있는,영어단어중 가장 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 단어였다.floccinau…로 시작되는 이 단어의 뜻은 「부(富)나 돈을 뜬구름같이 여기기」라던가.아직도 기억속에 생생히 남아있는 것을 보면이 단어 하나를 외우려고 어지간히 공을 들였던 것 같다.
일상생활에서는 물론 책에서도 전혀 쓰이지 않는 이런 단어를 외우는데 정력과 시간을 낭비한 것은 분명 쓸데없는 짓이었다.하지만 그때는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조차 제대로 알지 못할단어를 동양 조그마한 나라의 소년이 「완벽하게」 깨우쳤다는 엉뚱한 자부심에 사로잡혔던 것도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수십만개의 영어단어 가운데 이국(異國)의 소년이꼭 알아야할 단어는 고작 수천개에 불과하다.단순한 외국어 공부로서도 그렇고 시험을 위해서도 그렇다.그런 점에서라면 수만 수십만의 어휘가 수록돼있는 사전은 필요치 않을는지 도 모른다.하지만 사전이 「언어 곧 말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모름지기 사전이란 죽은 단어,쓰이지 않는 단어도 빠짐없이 수록돼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후에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이런저런 문학작품 특히 고전(古典)에 나오는 단어의 뜻을 사전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때 느꼈던 실망과 당혹감이 사전의 효용성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물론 고어(古語)나 방언(方言)따위만을 다룬 특수한 사전들 이 있지만 일반 사전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적잖은불만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국어사전은 어떨까.일제(日帝)에 빼앗겼던 우리말을 되찾은지가 이제 겨우 반세기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몇몇 국어학자들의 집념과 노력으로 제법 방대한 분량의 국어사전을 갖게 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사전속에 끼지 못한 ■ 리말들은 곳곳에 널려있다.그것은 영.호남이나 제주도 토박이들의 사투리에서도 나타나고,박경리(朴景利)의 『토지』나 김주영(金周榮)의 『객주』같은 몇몇 소설에서는 작가에 의해 발굴,복원돼 나타난다.특히 이들 소설이 쓰이지 않거나 사전에 서도 찾아볼 길없는 어휘들의 뜻풀이까지 곁들인 것은 음미해 볼만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지만 강산만 변하는 게아니라 말도 변한다.얼마전까지 곧잘 쓰이던 말들이 슬금슬금 사어(死語)가 되는가 하면 느닷없는 신생어.신조어들이 판을 치기도 한다.무릇 언어란 유동성(流動性)이 무엇보다 강하기 때문에죽었다가 되살아나는 경우도,안쓰이다가 갑자기 다시 쓰이는 경우도 많다.반세기 동안 전혀 다른 이념과 체제의 분단상태에서 서로의 길을 걸어온 남북의 언어가 점점 멀어져 이제는 거의 이질화된 것도 그런 점에서 당연하다.
그렇다면 「한국어」와 「북한어」는 다른 언어며,그 까닭에 우리말 사전에서 「북한어」는 제외돼야 할까.반드시 통일을 전제로하지 않더라도 「북한어」는 분명 한민족의 언어며,남쪽에서 쓰이지 않는 어휘라도 우리말 사전에 수록돼야 한다.
일상적으로 쓰이는 외국어는 수록하면서도 「북한어」를 제외하고있는 것은 남북한 언어의 이질화를 더욱 가속화 할 따름이다.
국립국어연구원이 97년 완간을 목표로 종합국어대사전 편찬을 서두르고 있다는 소식은 이제껏 사전에 오르지 못한 「북한어」.
죽은 말.옛말.사투리 등이 되살아나리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이런 중요하고 방대한 작업은 얼마나 빨리 마무리짓느 냐의 문제가아니라 얼마나 치밀하고 정확한 사전을 만들어내느냐의 문제다.이제서야 우리도 사전다운 사전을 갖게 됐다는 자부심을 한민족 모두에게 심어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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