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66. ‘패티 김 쇼’ 신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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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TBC -TV 프로그램 ‘패티 김 쇼’에 출연한 필자.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 공연이 성황리에 끝났다. 나는 일약 ‘한국 최초 창작 뮤지컬의 히로인’이 됐다. 그 인기를 배경으로 방송 프로그램이 제작되기도 했다. 국내 최초로 개인의 이름을 딴 ‘패티 김 쇼’다.

1967년 TBC-TV가 신설한 ‘패티 김 쇼’는 매주 중계되는 소규모 ‘패티 김 리사이틀’과 같았다. 매주 수요일 저녁 생방송된 이 프로는 상당히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매주 100통이 넘는 팬레터가 쇄도할 정도였다.

그때도 방송 매체의 힘은 지금 못지 않게 셌다. 아니, 요즘처럼 방송사가 많지도 않았고, 또 쇼 프로그램이 다양하지도 않던 시절이라 그 영향력은 지금의 수십 배였을지도 모른다.

특히 기억에 남는 팬이 한 분 있다. 바로 국어학자 외솔 최현배(1894~1970) 선생이다. 최 선생은 그 즈음 노년의 유일한 즐거움이 ‘패티 김 쇼’를 보는 것이라며 직접 쓴 편지를 내게 보냈다.

나는 지금도 이 사실에 상당한 자부심을 느낀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어학자이자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 받는 분이 직접 팬레터를 써 보냈으니 말이다.

최 선생이 보낸 편지는 석 장이나 됐다. ‘평소 방에 작은 상을 두고, 그 상을 책상 삼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서 지내지만 일주일에 단 하루, ‘패티 김 쇼’가 방송되는 수요일 저녁이면 그 상을 물리고 TV 앞에 아내와 나란히 앉는다’며 ‘아내와 함께 패티 김 쇼를 보는 것은 일주일의 낙이며, 또 다시 새로운 일주일을 기다릴 수 있는 힘’이라고 적었다.

최 선생은 방송에 출연한 나와 길옥윤 선생이 부부 사이에 적당한 호칭을 쓰지 못하고, 서로 이름을 부르는 등 어물쩍 넘기는 것을 눈여겨 봤다가 그 편지를 통해 아름다운 호칭을 알려주기도 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스럽고 달콤한 여자라는 의미로 ‘단미’라 부르고, 아내는 남편을 그리운 선비라는 뜻으로 ‘그린비’라 부르라고 했다. 그 편지가 대중에게 널리 소개되면서 그 즈음 많은 연인의 호칭이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최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큰아들이 직접 연락하기도 했다. “패티 김이 내 장례식에 와서 조가를 불러주었으면 좋겠다”는 유지(遺志)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연세대에서 열린 장례식에 참석해 ‘올드 랭 사인’을 불렀다. 그때만 해도 하고 많은 성악가를 다 놔두고 왜 하필 ‘딴따라’를 부르냐고 수군거리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고인이 평소 딸처럼 여기고 좋아하는 가수가 패티 김이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두 말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 역시 내 아버지와 같은 연배였던 그 분이 보여준 관심과 사랑을 지금까지 못 잊는다.

패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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