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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2면

아리영은 망연(茫然)히 그 광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빠진 것 같애!』 남편이 소리치며 일어서서 눈을 깜박거렸다. 『아,이젠 안 아픈데….』 소녀를 보는 남편의 표정이 의사를 대하는 소년같았다.
『그래도 병원에 다녀오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아내의 말에남편은 비로소 웃음을 보였다.
『말짱한데 뭐하러 병원에 가겠소.』 아리영은 새삼 소녀를 살폈다. 『이름이 「애소」라 했지?한자로 어떻게 쓰니?』 『사랑애(愛),흴 소(素)입니다.』 소장 부인의 질문에 소녀는 학생이 선생에게 하듯 반듯하게 대답했다.
『예쁜 이름이구나.어디서 그런 비방을 배웠니?』 『어머니한테요.』 자랑스런 눈빛이었다.
「어머니」라면 제주댁 여동생의 며느리다.「규합총서(閨閤叢書)」라는 옛 책에 여러가지 민간요법이 적혀있는데 어머니는 그것을읽고 급한 환자를 고쳐주곤 했었다며 소녀는 덧붙였다.
-「규합총서」.
서을희 여사에게 들은 적이 있다.18세기 조선조의 여류 실학자(實學者)빙허각(憑虛閣)이씨(李氏)가 엮은 여성백과사전과 같은 책이다.
『우리 음식 만드는 법도 실려있으니 열심히 보라고 하셨댔어요.』 『어머님 연세는?』 소녀는 고개를 숙였다.
『…돌아가셨습니다.』 가슴이 섬뜩했다.
『아버지가 재취하여 새어머니 사이에 남동생 둘을 뒀다는군….
』 나중에 남편이 그 집안 얘기를 들려주었다.벼 가시 사건 이후 남편은 그녀를 어린 여동생 대하듯 하고 있었다.서울의 서여사에게서 전화가 왔다.외할아버지 소장품 목록 만드는 일로 의논하자는 것이다.마침 「역사대학」수료식 파티도 있으니 겸사겸사 올라오라고도 했다.아버지도 따라 나섰다.아리영이 함께 가자고 졸랐기 때문이다.어찌된 일인지 이 몇주동안 정여사와 아버지 사이엔 연락이 끊긴 눈치였다.수료식에 나타날 그녀를 붙들어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한낮의 수료식 파티는 조촐했지만 꽃다운 봄기운으로 흥성대고 있었다.정여사에게 다가가 흰자작나무 숲 벤치서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음을 넌지시 귀띔했다.흠칫하는 눈으로 정여사는 아리영의 기색을 살피더니 아무 말 없이 뜨락으로 나갔다.
한참이나 기다려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목록 책자 일로 내일 서여사의 출판사를 찾기로 하고 미술관 밖에 세워둔 차로 돌아가보니 아버지는 먼저 와 앉아있었다.침통한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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