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세계 최초 여성 여행가의 끝없는 모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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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사벨라 버드
이블린 케이 지음
류제선 옮김
바움
440쪽, 1만8000원

“이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 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김수영 ‘거대한 뿌리’에서)

버드 비숍? 대체 누구이기에 시인 김수영이 이토록 예찬론을 펼쳤을까. 19세기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여성들을 눌렸던 사회적 편견을 떨치고 세계 곳곳을 모험했다. 최초의 여성 여행가로 알려졌다. 호주·하와이·일본·인도·티베트 등을 넘나들었다. 논픽션 여행기라는 새로운 글을 써 작가로도 이름을 널리 알렸다. 고종 시대 그가 쓴 『코리아와 그 이웃 나라들』(1898)은 유럽에 한국을 알린 지침서가 됐다.

버드가 여행길에 오른 가장 큰 이유는 건강 회복을 위해서였다. 그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요통과 두통에 늘 시달렸다. 의사가 ‘공기 전환요법’을 권하자 세계 각지로 바람을 쐬러 떠났다. 처방이 들어맞았는지 여행을 떠나면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하지만 돌아오면 다시 앓았다. 그가 고단한 여정을 멈추지 않은 진짜 이유는 여행과 글쓰기를 향한 열망이었다. 하지만 늘 남성들의 편견에 시달렸다.

“숙녀 탐험가? 치마 입은 여행가? 그 표현은 너무 거룩하다. 그들에게 우리의 떨어진 윗옷이나 깁게 하라.”

버드는 이렇게 유머 잡지에서 조롱까지 받았다. 이런 굴레는 아버지와 동생 죽음, 존 비숍과의 결혼과 사별을 겪고서야 어느 정도 풀렸다. 58세가 돼서야 “이제 내게는 아무런 구속이 없다. 남은 인생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하면서 살고 싶다”라고 했다.

버드가 제국주의 시각을 뛰어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한양에 대한 첫 인상으로 “어느 모로 보나 단조롭다”라고 말했다. “버려진 듯한 흙집에서 만난 농부들은 우울한 가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서양식 사고를 가진 우리들이 마주치는 것들이 미개함이나 윤리의 타락이 아닌, 정교하고 고풍스러운 또 하나의 문명이라는 것이다”라고도 했으니 그가 ‘편견덩어리’였던 건 아니다.

하와이의 활화산에서 치솟는 불덩이, 수천 마리의 벼룩이 뛰어다니는 일본 여관방, 페르시아(이란)의 빛나는 설원 등 19세기 세계의 생생한 모습은 이 책의 또 다른 묘미다.

김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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