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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리기행>2.태백시 철암동 시루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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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한밝달,태백산은 악의가 없다.그래서 살기(殺氣)도 없다.등성이는 온통 여자의 허리와 엉덩이같은 선으로 둘러 있으니 태고적 우리 할머니 모습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모르겠다.말하자면 여성적인 음산(陰山)이란 얘긴데,그러면서도 드러 내는 기운은 밝으니 음양조화를 이루었다고 해도 괜찮은 산이다.
백두대간의 중추요,한강.낙동강.오십천등 삼수(三水)의 발원처.따라서 기호.관동.영남지방 젖줄의 근원이다.실제로 태백산 문수봉은 여자의 풍만한 젖가슴 모양이기 때문에 젖봉이란 이름으로도 불린다.한편 백두대간은 이곳에서 방향을 틀어 소백.덕유.지리산을 지나 한라산에서 맥을 닫으니 또한 호남.호서.제주의 등뼈 구실도 한다.이 산은 지리산과 마찬가지로 수려하면서도 장엄(亦秀亦壯)하다.
나만 잘났다고 남을 배척하는 못난 산이 아니라 모두를 아우르는 산,품는 산,생명의 산,어머니인 산이다.흔히 말하는 명산(名山)이 아닌 영산(靈山)인 우리 고유의 사상이 살아남아 있는곳으로 이상하게도 이 산에는 큰절이 없다.우리나 라의 어떤 고을이나 마을도 그 주민들이 의지하고 존숭하는 특정의 산이 없는곳은 없다.이곳 태백의 경우도 주변 고을과 마을에서 그런 대접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산이 다른 산과 다른 특징을 갖는 까 닭은 민족적 자존심의 마지막 보루중 하나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나라의 3영산(三靈山)은 백두.태백.한라산이다.영산과 명산은 구분되어야 한다.영산에는 외세가 개입하지 못한다.그래서 백두.태백.한라산에는 가장 민족적 종교에 근접했다고 할 수 있는 불교의 사원까지도 대찰(大刹)이랄 수 있는 것 은 없다.우리민족에게는 삼신(三神).삼교(三敎)가 중요한데 백두와 한라에태백이 만나야 삼신이 어울리는 것이 아니냐는 논리다.특히 태백은 밝음으로 오르는 사다리,밝은 자리(배꼽),밝음의 우두머리로삼신의 으뜸이니 이를 받들어 대접함 은 우리들의 의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받들어 모심에 있어서는 홀로 외로이 조화를 부릴 수 없는 것(孤陽不生 孤陰不成)이니 그를 위해 태백산은 어머니가 되고 함백산은 아버지가 되었다.무릇 조화는 새생명을 창조함에 그 목적이 있는 것으로 그러자면 샘굿(자궁)이 있어야 하 는데 황지가있으므로 태백산이 어머니가 된다는 주장이다.도원지(桃源池)가 자궁이므로 함백산이 어머니라는 주장도 있다.젖 먹이는 어머니를아버지인 태백산이 기웃이 내려다보는 모습이란다.어쨌거나 태백산에서 보면 연화봉이 연꽃 봉오리처럼 보인다.청옥산-백병산-태백산,함백산-백병산-청옥산의 이중 보호 구조요,게다가 거느린 가족은 쌍으로 많다.요컨대 태백.소백산은 한 몸체,한 가족이라는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리라.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이론풍수에 의해 상당 부분 왜곡된 외래풍수는 풍수의 목적을 산소자리나 집터 잘잡아 내식구 내가족 잘먹고 잘살자는 이기적 잡술로 만들고 말았지만 아직도 현장에 남아있는 우리 자생의 고유풍수는 삶터의 바람직한 터잡 기와 그 상징성 부여에 큰 가치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런 터가 그저 잘 고른다고 제 차례가 오는 것은 아니다.땅은 부모님이니 그에 합당한 대접을 올려야 불안없는 삶터를 꾸려볼 수 있는 것이다.오늘의 우리가 부모님인 땅을 어떻게인식하고 다뤄 왔는지를 되돌아 본다면 어찌 감히 근심걱정 없는명당 길지를 바랄 수 있으랴.그저 소유하고 이용하기에만 급급해오지 않았는가.부모의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아 사경을 헤매게 해놓고 아직도 철없이 유산을 더 달라고 조르는 패륜을 서슴지 않는 것이 오늘의 우리가 아닌가 .
꼭 필요하다면 우선 부모님의 병환부터 고쳐놓고 볼 일이다.
철없는 어린이들은 의식없이 부모님을 괴롭히는 수가 있다.젖을더 달라고 떼를 쓰고 밥을 먹이는데 옷을 더럽힌다.이것이 바로공해고 오염이다.하지만 다 큰 자식이 이런 짓을 하면 누가 가만 두겠는가.한계를 넘으면 응징하여 버릇을 고 치는 수밖에 없다.나는 요즈음 두렵다.아무리 하해와 같은 마음씨를 가진 부모님일지라도 지금같은 상황이라면 언제 벽력같은 꾸지람이 내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백시철암동 상철암에서 나는 모름지기 사람들이 자신의 부모님인산을-풍수에서는 산이 곧 땅이므로-땅을 어떤 식으로 받들어 모셔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는 좋은 예를 만날 수 있었다.그것은곧 시루봉이었다.떡시루처럼 생겨 시루봉이란 이름 이 붙은 이 산에는 밑에 인공이 가미된 조그만 동굴이 패여 있다.동굴 안에는 서낭당이 들어섰는데 이 당집은 인근 마을 주민들의 공경의 대상이다.시루에는 불을 지펴야 떡이 쪄지는 법이고 이 동굴과 당집은 바로 이 시루봉에 불을 지피는 아궁이 역할을 한다는 것이 주민들의 생각인 것이다.
사경의 부모님에게 유산을 조르는 패륜아들로서는 별천지의 얘기가 아닐 수 없다.산을 대접함이 이 정도는 되어야 좋은 물과 공기(風水)를 기대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게다가 시루봉은풍수가 이기적 잡술 나부랭이가 아님을 가르치고 있으니,이 산날망(등성이)에 다른 곳은 모두 석회암인데 유독 그곳만 황토로 되어 있는 소위 시루형국의 명당이 있다.이곳에 묘를 쓰면 후손에게 좋다는 바람에 누군가가 산소를 썼는데 밤만 되면 인근 새터 마을의 개들이 그곳을 보고 짖는 바람에 결국 파묘하고 말았다는 소문이 있다.
풍수는 저 하나 잘되자고 산소자리 잡는 괴술(怪術)이 아니다.산을 대접하여 근심없는 삶터를 가꾸어보자는 것이 우리의 자생풍수다.시루봉이 바로 그 점을 교육하고 있는 것이다.
〈前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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