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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신세대 변사 조희봉 원로 희극인 구봉서에게 길을 묻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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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코미디 연기의 대선배 구봉서<左>씨가 21세기에 변사 역할을 하게 된 배우 조희봉씨를 만나 무성영화 시절의 추억과 연기에 대한 생각을 들려줬다. [사진=최승식 기자]

대중문화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변사(辯士)가 다시 등장한다. 최근 필름이 새로 발견된 현존 최고의 한국영화 ‘청춘의 십자로’(1934년·감독 안종화)를 통해서다. ‘청춘의 십자로’는 9일부터 서울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에서 3주간 열리는 개관기념영화제의 개막작으로, 변사의 해설과 새로 작곡한 음악을 곁들여 상영될 예정이다. 상영, 아니 공연이 될 이 행사의 연출을 맡은 김태용 감독은 현역배우 누구도 해보지 못한, 아니 보지도 못한 변사 노릇을 배우 조희봉(37)에게 맡겼다. 연극배우로 출발한 조씨는 최근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드라마 ‘쾌도 홍길동’ 등에서 개성 강한 연기를 보여줬다. 조씨는 과거 변사들의 목소리를 녹음한 음반과 당시의 말투를 담은 문헌을 참고하고 있다.

조씨가 무성영화 시대를 기억하는 관객이자 코미디 연기의 대선배 구봉서(82)씨를 1일 자택으로 찾아갔다. 서울에서 자란 구씨는 어린 시절 종로의 우미관·조선극장 등에서 무성영화에 울고 웃던 시절을 떠올리며 40여 년 나이 차의 후배를 반갑게 맞았다. 두 사람의 만남은 후배가 묻고, 선배가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그때는 극장 바깥에 변사 이름이 크게 씌어 있었고, 관객들도 그 이름을 보고 들어가고 그랬어요. 잘 하는 변사들은 하도 많이 해서 각본을 거의 보지도 않았어요. 애드리브도 많았지. 예컨대 미국영화인데도 변사가 이러는 거야. ‘저기 압록강 물이 흐르는데…’ 그러면 관객들이 ‘거기도 압록강이냐’라고 하고, 변사는 ‘압록강이 이사 갔다, 이사 갔어’ 해서 한참 웃고. 잘 하는 이들은 노랑목(판소리에서 목청을 많이 떨거나 목에서 얄팍하게 내는 소리)을 써가면서 물 흐르듯 말을 했어요. 세계사는 또 어쩜 그렇게 잘 아는지, ”

-듣고 보니 변사는 배우·연출·작가를 겸하는 종합엔터테이너가 아닐까 싶네요. 국산 첫 유성영화 ‘춘향전’이 나온 게 1935년이니까, 이후로는 변사가 점차 사라졌겠네요.

“나는 라디오 방송에서 해본 적이 있어요. ‘막동이 가요만보’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디스크 자키를 변사 목소리로 할 수 있느냐고 해서 그렇게 했지. 어렸을 때 극장에서 많이 봤으니까. ‘임자 없는 나룻배’ ‘금붕어’ ‘검사와 여선생’ 등등. 찰리 채플린 영화도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본 기억이 나.”

-변사의 해설이 곁들여진다는 점에서 그 때의 영화는 라이브 공연의 맛이 있었겠네요. 악극단 시절에도 혹 영화를 함께 상영하거나 했나요.

“악극단이 아니라, 그 전에 이중연쇄극이라고 있었어요. 무대에서 한참 연기를 하다가 등장인물이 산으로 도망을 가면 스크린이 내려와서 배경이 산이 되는 거지. 그걸 쫓아가서 잡아오면 다시 스크린이 올라가고. 재미있었어요. 해방 이후에도 누가 몇 번 시도를 했었는데, 본 사람이 별로 없지.”

-어렸을 때 선생님의 코미디 연기를 흑백TV로 본 기억이 생생합니다. 배삼룡·서영춘·이기동 이런 분들하고요. TV에서도 최고의 스타였지만, 악극단에서 연기를 시작했고, 영화도 참 많이 하셨죠. 어느 쪽 연기가 더 어렵던가요.

“영화 그만둔 지 30여 년이 돼가는데, 그 사이 400편쯤 했으니 참 많이 했지. 이쪽 영화에 나오는 이름을 저쪽 영화에 가서 부르기도 하고 그랬지. 무대나 영화나 어려운 점이 있어요. 영화는 신인도 할 수 있잖아. 한 장면 찍고 컷하고, 서로 한참 얘기해서 다음 장면 찍을 수 있으니까. 무대는 그게 안 되잖아. 거기는 신인은 못하지. 근데 영화는 클로즈업이 되면 스크린에 땀구멍까지 나오는 셈이니 조심스럽지.”

-하면 할수록 저도 영화와 연극은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코미디 연기도 연극에서는 관객에 맞춰 속도조절이 가능한데, 영화는 그런 부분을 미리 계산해 정해놓고 해야 하니까요.

“연극을 했으니, 자네도 잘 알겠네. 연극 잘 하던 사람이 드라마 하는데, 보면 별로인 경우도 많아. 드라마에서 웃긴다는 사람도 코미디를 같이 시켰더니 꼼짝 하지 못하는 경우도 봤고. 다 자기가 놀던 물이 있나 봐. 다만 무대라는 게 한번 빠지면 못 고치는 병이지. 밥을 굶어도, 어떻게 무대에 설까 그 생각만 하게 되니까. “

-정작 선생님은 악극단·영화·TV에서 고루 최고의 인기를 누리셨잖아요. 하나를 잘 하는 것도 힘든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지. 그게 잘 못하는 거야. 가수들은 쉬다가 새 음악 발표하면서 인기관리를 잘하잖아. 요즘도 그래. TV를 틀면 젊은 개그맨들이 여기저기 다 나오는데 미련한 짓이야. 예전에 내 때야 많이 나와야 인기가 있는 줄로 알았지. 젊었으니까 할 수 있었던 것도 있고. 건강? 젊었을 땐 감기 걸려도 약 쓸 줄을 몰랐는데, 요새는 골골하지. ”

-막동이라는 별명을 낳은 ‘오부자’를 비롯해 코미디 영화를 많이 하셨는데, ‘수학여행’(감독 유현목)처럼 진지한 영화도 있던데요.

“나중에 들으니까 유현목 감독이 ‘쟤는 코미디 할 배우가 아닌데’ 하면서 시켰다고 그러더라고. 진지한 연기는, 내가 무대에 나가면 관객들이 웃지 않을까 걱정되고, 옆에서 동료들이 내가 어떻게 하나 보는 게 쑥스러워서 못 하겠더라고. 내 코미디도 시대의 조류를 타고 했던 거지. 요즘 내가 나오면 웃겠나.”

-‘청춘의 십자로’는 필름만 발견됐고, 대본이 없어요. 김태용 감독이랑 머리를 맞대고 대본을 만들고 있는데, 참 어렵더군요. 또 영화 중에 일부분의 필름이 없어서 그 내용도 채워야 하고.

“힘들겠지만 대본 쓰는 건 좋은 공부야. 예전에는 지금처럼 코미디에 작가가 따로 없었거든. 내가 다 쓰는 거야. 길거리 다니면서도 뭐 웃음거리 없나, 그것만 보고 다녔지. 병원에 가도 의사가 어떻게 하나 유심히 보고. 자네가 언제 의사 역을 할지, 무슨 역할이 돌아올 지 모른다고. 그걸 준비하는 게 배우의 공부지. 근데 무성영화는 말이 너무 많으면 사실 재미가 없어요. 연극이나 영화나 대사가 적당해야지 너무 많으면 지루해져요. 채플린 영화는 자막 몇 줄로도 관객들이 다 이해하잖아.”

구씨의 얘기는 “요즘 너무 많은” 또 다른 것들에 대한 지적으로 이어졌다. “욕설이 너무 많아. 영화는 물론이고 연극도. 그게 욕 한마디 하고 암전이 되는 정도면 좋은데, 요전에 본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상소리더라고. TV 드라마는 눈물이 너무 많고. 여주인공이 원샷으로 등장한다 싶으면 곧 눈물을 흘려요. 그게 잘하는 연기인 줄 아나 봐. 표정연기가 안 되는 건데.”

지금보다 눈물 흘릴 일이 더 많았을 시대를 살아온 그는 눈물보다 웃음의 편이었다. “요즘은 연극이든 뭐든 관객이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들어. 배경을 별로 보여주지 않고 아 이런 거구나, 저런 거구나 알아가게. 연극이든 영화든 오락인데, 마음 편하게 봐야지. 뭐든지 편안한 마음으로 보고 막 웃고 그래야지.”

청춘의 십자로의 당시 광고 전단

-‘청춘의 십자로’에 곁들일 음악도 새로 만드는 중입니다. 아코디언·첼로·바이올린 등등으로 현장에서 연주하려고요.

“ 내가 악극단에서 아코디언을 했었는데, 소리 크다고 야단 맞고 그랬어. 아코디언 하나의 음량이 바이올린 스무 개랑 똑같다면서. 이것도 하고 싶던 말인데, 음악이 좀 덜 나왔으면 좋겠어. 중요한 순간에만 쓰거나, 하나의 멜로디를 가지고 변주해도 음악이 좋은 영화가 많잖아. 배우들이 대사하는데 쓸데없이 금속성의 음악까지 나오는 건 비위가 상해. 가뜩이나 귀도 나쁜데, 대사도 잘 안 들리고.”

글=이후남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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