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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인생 책임지겠다는 ‘나쁜’ 부모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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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호 24면

필자가 상담한 이들 중에는 자녀에게 원하지 않는 전공과 공부를 강요하다가 무기력감에 빠진 자녀 때문에 골치를 썩이는 부모가 적지 않았다. 노동의 즐거움과 경제개념, 독립심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서양식 가치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한국적 현상이다.
일찌감치 자녀들을 분가시키는 일본 역시 자녀들에게 지나친 투자는 하지 않는다. 공들여 봐야 되돌아올 것도 없다는 것을 경험상 알게 된 것이다. 외국의 교사나 교수들은 한인 학생들에겐 동기와 자발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자주 지적한다. 의식이 바뀌지 않으면 제도와 환경이 달라도 한국식 교육의 병폐는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벌써부터 기업체에서는 부모의 재산이 많고 강남 출신의 유학생을 채용하기를 꺼리는 분위기다. 매뉴얼 달라면서 과외 받으러 온 줄 착각해 시키는 일이나 간신히 하는, 학벌은 좋은데 추진력이 부족한 부잣집 자제들 때문에 상사들은 골치가 아프다.
상류층일수록 집 마련은 물론 손자 교육까지 부모 몫이라서, 부자들만 간다는 소위 명문 유치원에서는 조부모 경제력부터 물어본다고 한다. ‘부모 장학금’이라며 부끄럼 없이 자랑하는, 학벌은 좋은데 혼자 설 생각은 애초에 없는 젊은이가 너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좋은 대학에 입학시킨 부모들을 성공적 인물로 미화하는 매스컴도 우습다.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낸 어머니들에 대한 찬사 뒤에는, 학벌이 앞으로의 자녀 인생을 좌우할 것이고 자녀 인생은 어머니가 결정한다는 집단 최면이 숨어 있다. 곱게 자라 좋은 간판 딴 자녀들이 사회에 적응 못하고 부모를 함부로 대하는 뒷얘기들을 정말 모르는지.

교육에 대한 투자가 모두 병적인 것은 아니지만, 교육철학의 부재는 꼭 짚어 보아야 한다. 대입제도 고치고 자립형 사립고 만든다 해도, 땀 흘리기는 싫고 부동산이나 부모 유산만 바라보는 퇴폐적 물신주의에 빠진 젊은이만 양산한다면 곤란하다. 공무원시험, 자격증, 로스쿨, 의학대학원 준비하는 백수들은 넘쳐나지만, 기업은 인력이 모자라 이주노동자에게 매달려야 한다. 번듯한 직장 아니면 아예 다니지 말라는 부모도 있다. 부모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무능력하고 의존적인 허깨비들만 가득한 사회는 끔찍하다.

자식에게 먹고살 만큼만 남겨주겠다는 한 기업인의 발언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으나, 부모가 다 큰 자녀 먹을 것을 왜 걱정하는가. 제 힘으로는 먹을 것도 못 찾는 금치산자 자식들인가? 자녀가 일하는 습관을 익혀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해 주면 그만이다. 물려받은 큰돈을 한순간에 날린 이들의 상담도 가끔 한다. 뭐든 부모에게 의존했으니 경제 개념과 판단력이 있을 리 없다. 자녀를 죽을 때까지 책임지겠다는 부모는 실상 자녀를 망치는 나쁜 부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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