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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둘레길 … 멀리 보며 걷기, 산을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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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늦긴 했지만 우리나라에도 장거리 트레일 코스가 생겼다. 사단법인 숲길이 산림청의 지원을 받아 지리산 트레일 코스를 내놓은 것이다. 구례·남원·하동·산청·함양 등 지리산 둘레 5개 시·군의 숲길, 강변길, 논둑길, 마을길을 환(環) 형태로 연결해 총연장 300㎞의 코스로 엮었다. 하루 7시간씩 걸을 경우 총 32.5일이 걸린다. 완전 개통은 2011년이지만 어제(1일) 2개 시범구간이 공개됐다. 과연 ‘걷는 맛’이 어떤지 미리 돌아봤다.

글=객원기자 설은영·장치선 ,
사진 제공=숲길


제1코스 다랭이길 - 조팝꽃 향기 솔솔

다랭이길은 전북 남원시 산내면 매동마을에서 경남 함양군 마천면 금계마을을 잇는 총 10.68㎞ 구간이다. ‘다랭이’는 다랑논을 부르는 남원시 산내면 주민들의 방언. 길은 매동마을의 소나무 숲에서 시작된다. 600년 된 고목과 순이 갓 난 여린 생명들이 조화를 이루는 소나무 숲은 거의 ‘자연 그대로’다. 사람의 흔적은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와 걷기 좋도록 다듬어놓은 길바닥 정도가 전부다. 길도 인위적으로 꾸미지 않았다. 비가 와도 흙길이 손상되지 않도록 코스 곳곳에 도랑을 파놓았을 뿐이다.

물 마실 곳도 마찬가지. 딱히 ‘약수터’가 따로 없다. 길을 걷다 가늘게 흐르는 물줄기가 보이고 바위 위에 바가지 하나 얹혀 있으면 그곳이 바로 약수터다.

숲을 빠져나오면 상황마을로 접어든다. 이쯤에서 여행자들은 십중팔구 사진기를 찾게 된다. 쫙 펼쳐진 다랑논(계단식 논)의 풍경을 보면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다랭이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를 알겠다. 다랑논 정상에 서면 산바람에 조팝꽃 향이 실려온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흰 꽃이 아름답긴 하지만 너무 가까이 다가서지 않는 게 좋다. 한참 꿀을 딸 시기라 벌이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는 게 마을 주민들의 말이다.

다랑논 옆에는 물빛 고운 저수지가 하나 있고, 그 옆으로 쇠뜨기가 가득한 길이 나 있다. 쇠뜨기길은 등구재로 이어진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삶과 문화를 이어주던 고갯마루다. 경사가 꽤 있는 편이라 걷다 보면 조금 숨이 찬다. 길 좌우로 벌 농장과 옻나무 농장, 다랑논이 계속 펼쳐지므로 쉬엄쉬엄 구경하며 가자. 한참 걷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 펼쳐지는 광경이 압권이다. 어깨를 맞댄 키 큰 봉우리들이 한순간 시야를 메우는 모습에 숨이 턱 막힌다. 날이 좋으면 멀리 천왕봉도 구경할 수 있다.

등구재를 지나 창원마을에 들어서면 길은 당산(堂山)으로 이어진다. 이곳에 오르면 오백 년 묵은 느티나무 아래서 지친 다리를 쉬어 갈 수 있다. 위치가 높고 시야가 확 트여 지리산의 주 능선을 감상하는 데도 그만이다. 창원마을에 이어서 금계마을까지 가면 첫 번째 코스인 다랭이길이 끝난다. 느긋한 걸음으로 세 시간 정도 걸린다.

제2코스 산사람길 - 아픈 역사 간직한 벽송사

경남 함양군 마천면 의중마을에서 휴천면 세동마을까지 총 10.1㎞ 구간이다. ‘산사람’은 마천면 산간 사람들이 빨치산을 부르던 이름이다.

의중마을 당산은 산벚이 아름답고 볕이 잘 든다. 덕분에 풍광이 더없이 평화롭다. 마을 사람들은 칠순이 넘은 노인들까지 옻공예를 하며 지낸다. 채 스무 살이 되기 전에 기술을 익혀 평생 옻을 만지며 살아오셨단다.

자식들을 일찍 서울로 떠나보내셨다는 할아버지·할머니들. “그래도 요즘은 지리산 자락에 삶을 트는 젊은이들이 많이 생겨 덜 외롭다”고 하신다. 얼핏 가슴이 짠해진다. 마을 곳곳엔 꽃과 나무들이 예쁘게 가꿔져 있다. 수십 년 옻공예로 단련된 여문 손끝에서 나온 솜씨다.

이정표를 따라 마을 숲으로 들어서면 벽송사 가는 길이다. 샛노란 배추꽃밭, 새끼 가재로 가득한 계곡을 지나 산허리로 올라간다. 걷는 내내 지리산 봉우리와 능선이 따라온다.

희귀한 고목들로 둘러싸인 벽송사는 얼핏 고요하고 신비롭게만 보인다. 하지만 알고 보면 아픈 역사의 그늘이 깊게 드리워져 있다. 벽송사는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야전병원으로 사용됐던 곳이다. “아침에는 군인들이, 밤에는 산사람들이 찾아와 밥을 얻어먹고 가고 그랬지. 밥 달라고 해서 준 것밖에 없는데, 그 탓에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고 참 많이 죽었어.” 김진배(73) 할아버지는 당시의 비극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벽송사에서 내려올 땐 소나무 쉼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300년도 넘은 소나무가 기암절벽 위에 아찔하게 서 있다. 쉼터를 지나면 길은 엄천강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동마을로 이어진다. 산사람길의 종착점이다. 세동마을에서는 한지 가내수공을 한다. 집집마다 마당에 종이를 널어 말린다. 한지만큼이나 소박한 마을의 풍경이다. 산사람길 역시 세 시간 정도 걸으면 좋을 거리다.



Tip

■ 지리산 둘레길 안내센터(www.trail.or.kr, 063-635-0850)에 탐방 신청을 하면 간단한 환경교육과 함께 코스를 안내해준다. 지도가 포함된 안내책자도 받을 수 있다.

■ 혼자 걷기가 부담스럽다면 매주 수·토요일 실시되는 ‘길동무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길잡이와 함께 시범구간 일부 코스를 걸을 수 있다. 매회 20명 제한.

■ 도중에 숙박을 할 예정이라면 사전 예약을 하는 것이 좋다. 시범구간 내 숙박시설로는 매동마을(maedong.org), 송전마을(kr.blog.yahoo.com/songjunri) 민박과 실상사 템플스테이(www.silsangsa.or.kr) 등이 있다.

■ 시범구간 이외의 코스를 미리 밟아보고 싶다면 안내센터 ‘지리산 둘레길 탐험대’에 문의할 것. 안내 표지판 등이 아직 정비돼 있지 않다.

문화체육관광부, 대한가정의학회, 부산 · 광주 · 전남교육청, 세계사회체육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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