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고아 사랑, 영원히 기억하겠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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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중 버려진 고아 1000명의 목숨을 구한 한국판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 고(故) 러셀 브레이즈델(사진) 목사가 97세로 세상을 뜬 지 오늘로 1년이 됐다. (본지 4월 26일자 30면)

브레이즈델 목사를 추모하고, 1주기에 맞춰 나온 그의 한글판 회고록『전란의 아이들, 그 1000명의 아버지』출판을 기념하는 행사가 1일 광주광역시의 사회복지법인 충현원에서 열린다. 행사에 맞춰 브레이즈델 목사의 아들인 카터 브레이즈델(71) 목사 부부가 29일 한국을 찾았다.

미국보다 한국에서 먼저 나온 아버지의 회고록을 받아든 아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는 늘 ‘옳다고 생각하는 건 주변에서 말리더라도 해야한다’고 말씀하셨다. 더 많은 사람이 자랑스러운 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게 돼서 가슴이 너무 벅차다.”

브레이즈델 목사는 전쟁 발발 직후 미 제5공군사령부 군목(중령)으로 한국에 파병됐다. 서울에서 복무한 그는 부모를 잃고 거리를 떠돌던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연합군이 남쪽으로 후퇴하고 피란 행렬이 이어졌지만 버려진 고아들을 챙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를 목격한 브레이즈델 목사는 작전사령관을 설득해 공군 수송기 16대를 확보했다. 그런 다음 1000명의 고아를 트럭에 실어 김포 비행장으로 옮긴 뒤 비행기에 태워 제주도로 피란 보냈다. 이 이야기는 57년 록 허드슨이 주연한 ‘전송가(Battle Hymn)’로 영화화됐다. 하지만, 영화에서 주인공은 브레이즈델 목사가 아니라 딘 헤스 소령으로 그려졌다.

이에 대해 아들은 “헤스 중령이 직접 고아들을 피란시키지는 않았지만 제주도에서 고아들을 보살핀 훌륭한 군인이었고 존경받아 마땅하다는 게 아버지의 생각”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흥행 때문에 영화가 지나치게 극적으로 묘사되는 등 미흡한 부분이 보였다”며 “아버지의 진짜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었다면 훨씬 재미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가방에서 누렇게 바랜 편지를 두 통 꺼냈다. 영화가 개봉된 해에 브레이즈델 목사가 과거 한국에서 함께 복무했던 동료 군인과 주고받은 서신이었다.

고(故) 러셀 브레이즈델 목사의 아들 카터 브레이즈델 목사<右>가 부인과 함께 아버지의 회고록을 보고 있다.

“영화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야한다”며 헤스 소령을 비판하는 동료에게 브레이즈델 목사는 “나도 영화를 봐서 알고 있지만 남이 알아주기를 바랐던 것이 아니므로 아이들이 무사하다는 사실만으로 내겐 충분하다. 그를 비난하고 싶지 않다”라고 답했다.

2001년 러셀 브레이즈델 목사는 50여 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아 자신의 손으로 피란시킨 고아들을 만났다. 이미 주름진 노인이 된 한국의 자식들이 그를 맞았다.

아들은 “그날은 아버지 인생에서 가장 멋진 순간이었다”며 “돌아가실 때까지 그 순간을 결코 잊지 못했다”라고 전했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러셀 브레이즈델 목사는 회고록의 한국어 판권을 충현원에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글·사진=홍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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