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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칼럼

불신 사회의 명장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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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재벌 회장은 누가 뭐래도 한국 경제를 이끄는 다이묘(大名)다. 이들의 영향력은 한반도를 뒤덮고 남을 정도인데, 그 대가를 치르는지 크고작은 수난을 감당하느라 바람 잘 날 없다. 현대 회장은 비자금 조성 혐의로 옥고를 치렀고, 한화 회장은 아들 명의로 주먹을 날리다 낭패를 당했다. 지나친 자식 사랑이 화근이었다. 재벌 회장들은 사회적 감시의 항시적 표적이다. 시민사회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 덕에 재벌 기업들은 긴장했고 투명성을 키웠다. 이번에는 ‘일등 기업’ 삼성이 감시망에 걸렸고, 결국 회장 퇴진을 불렀다.

다이묘 중의 다이묘인 이건희 회장의 퇴진에 대한 반응은 엇갈린다.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비난론과 안타깝다는 동정론이 그것이다. 이 회장의 쇄신 결단은 환부를 도려내고 건강한 기업으로 거듭나게 하는 쓴약이라는 점에는 모두 동의한다. 그러나 특검이 밝혀낸 비리 내용은 삼성 사태의 뇌관을 건드리지 못했고, 오히려 삼성의 불법 승계와 로비 사건에 면죄부를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삼성 사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게 비난의 요지다. 동정론은 사뭇 다르다. 숙련된 검사들이 백일 동안이나 뒤졌는데도 비자금 외에 찾던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면, 근거없는 고발 행위를 자제해야 하고 한국의 주력 기업을 정쟁의 소용돌이에 구겨넣는 미련한 짓을 자제해야 한다는 목소리다. 특검을 신뢰한다는 입장에서, 필자는 동정론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천문학적 규모의 비자금만으로도 국민의 억장은 무너졌다. 그런데, 지난해 대선 정국을 강타했던 무차별적 로비 폭로가 무혐의로 밝혀졌다면, 삼성을 정치 공세로 끌어들인 애초의 의도, 즉 수세 정국을 돌파해 보려던 정치권의 그 ‘불순한 야망’을 한번쯤은 짚어야 한다. 특검을 결의하고 뿔뿔이 흩어진 정치인들은 삼성 비자금이 유력 후보 근처에 무한정 살포되었을 것으로 확신했다. 그런데, 확신했던 것은 없었다. 삼성 사태는 결국 ‘정치 활극의 제물’이었고, 이 회장의 말마따나 “지난날의 허물은 모두 떠안고 가겠다”는 참회로 막을 내렸다. 특검의 수사를 믿는다면, 심정만 갖고 대들었던 내부자의 보복성 폭로와 그것을 활용해 열세를 만회하고자 했던 정치권의 그 불순한 의도는 누가 어떻게 처벌하는가.

재벌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솔선수범의 의무는 막대하다. 그러나 경제대국으로 도약하려면 ‘불순한 고발’과 ‘무책임한 비판’으로부터 주력 기업들을 보호해야 한다. 이것은 국민의 책무다. 진정 세계에 내세울 만한 국민 기업과 자랑할 만한 CEO를 갖고 싶다면, 감시와 고발도 중요하고, 정권에 한없이 약했던 재벌들의 과거사와 그 성장 내력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현재의 ‘공정한 잣대’를 재벌 기업들에 들이대면 모두 ‘범죄 집단’이 될 가능성은 여전하다. 쇄신하도록 국민적 압력을 가하는 것과 아예 낙인찍어 퇴출을 명하는 것은 다르다. 지난 정권 때 과거사 청산이 얼마나 많은 ‘억울한’ 친일 인사를 양산했던가. 주력 기업들은 국민적 자산이다. 끝내 사망까지를 요구하는 ‘죽임의 비난’을 오히려 경계해야 한다. ‘정의로운 고발’이라도 근거가 없다고 판명되면 고발자는 응분의 책임을 져야 옳다. 삼성이 잘했대서가 아니라, 무분별한 고발로 국민 자산이 쑥대밭이 될까 걱정돼 하는 얘기다.

몇 주 전 러시아 우주선 발사 때 관제탑 모니터 하단에 선명하게 새겨진 한국 기업들의 로고를 보았을 것이다. 우주산업을 향한 의지가 느껴져 가슴이 벅찼던 기억이 새롭다. 모스크바에 간 한국 관광객들은 ‘현대 차’를 타고 ‘LG 다리’를 건너 ‘삼성’ 로고를 보며 붉은광장에 진입한다. 러시아인들은 휴대전화 시장 26%를 점한 삼성을 ‘쌈쑹’으로 발음할 줄도 알게 되었다. 어쨌든 ‘쌈쑹’은 구공산권을 비롯해 유럽, 미국, 남미 시장을 지배하는 IT 강국 코리아의 이미지다. 30년이나 걸린 이 국민적 역사(役事)를 추문의 용광로 속으로 밀어넣은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 한다. 영웅심리로 분장한 그 변호사는 여전히 당당하고, IT 혁명을 주도한 재벌 회장은 용서를 빌어야 하는 이 뒤집힌 현실을 허용해도 되는 것인지를 말이다. 책임지지 않는 고발을 방관하고 박수를 보내는 것이야말로 ‘불신 사회’의 명장면이다.

어쨌든, 세계 기업을 만들어낸 유능한 기업인이 결국 물러났다. 그가 스스로 물러났을까, 아니면 우리가 공모해 그를 밀어냈을까? 유능한 CEO들을 하나씩 둘씩 허물을 안겨 퇴진시키는 이 못난 짓을 그만둬야 하고, 기업가 정신에 대한 ‘존경의 습관적 철회’를 중지해야 한다. 경제대국의 꿈은 기업인과 국민의 합작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