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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뿔난 아줌마들…시청자는 즐겁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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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KBS 주말드라마 ‘엄마가 뿔났다’(극본 김수현, 연출 정을영)의 기세가 매섭다. 최근 시청률 30%를 넘어섰다. 원동력은 평범한 서민 엄마 김한자(김혜자·사진左)와 우아한 부잣집 사모님 고은아(장미희·右)의 대립이다. 특히 이들이 한자 딸 영미(이유리)와 은아 아들 정현(기태영)의 결혼을 둘러싸고 양가 상견례, 식사 초대, 결혼식장 문제 등으로 충돌할 때마다 시청자들은 대리만족을 느끼곤 한다.

19일 방영분도 그랬다. 한자 부부가 대궐 같은 사돈 집에서 식사하는 장면. 고급 식기를 본 한자가 “귀족놀음하는 것 같아 좋다”고 말하자 은아는 “말씀이 지나치다”며 발끈한다. 그런데 사돈 부부를 배웅하러 나간 은아의 구두굽이 부러진다. 영미가 괜찮으냐고 묻자 은아는 얼른 둘러댄다. “맨발이면 어떻니. 잔디 좀 밟자꾸나.” 한자는 자동차에 타자마자 배를 잡고 웃으며 고소해한다.

두 엄마의 인기는 희생적 어머니나 속물 사모님 이미지에 상당 부분 기대면서도, 거기에서 한 발 나아간 캐릭터 덕분이다. 한자는 한국의 전통적 엄마이면서도 제목처럼 마냥 순종하지 않는다. 집안 주도권을 쥔 사람은 할아버지(이순재)도, 아버지(백일섭)도 아니다. 엄마가 한 번 뿔나면 온 가족이 긴장한다. 은아도 마찬가지다. 미워할 수만은 없는 입체적 인물이다.

“포근하고 보듬어 안는 엄마라기보다 자기 할 말 다 하는 엄마”(한자), “ 곱게 자라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귀엽다”(은아) 등의 시청자 소감이 자주 눈에 띄는 이유다. 그러면서도 자식 문제로 애 끓이는 것은 비슷한 두 엄마, 그들의 캐릭터를 비교해 봤다. 두 베테랑 배우의 천연덕스러운 연기로 재현되는 서민층과 부유층의 ‘문화충돌’은 시쳇말로 ‘배틀’이라 부를 만하다.

#뼛속까지 귀족, 우아한 사모님

은아는 천생 귀족이다. 한자는 “먹고 모양내는 것밖에는 없는 사람”이라고 툴툴대지만, 은아로서는 “귀족으로 태어나 귀족으로 사는 것”이다. 극 초반 그렇고 그런 속물이었던 은아는 장미희의 실감 연기에 힘입어 최근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대사도 족족 화제다. 교양미를 한껏 뽐내며 가사도우미를 부르는 “미세스 문~”과 구관조를 꾸짖는 “조용히 해!”는 이미 유명해진 그만의 트레이드 마크. 일부 항의를 받았던 “길음동이 대체 어디 붙은 동네니?”(영미가 어디 사는지를 물어보며)를 비롯해 “정말 배반감이 뭉게구름이구나”(정현이 계속 결혼하겠다고 고집부리자), “이태리 본사에 정식 클레임 걸어야겠어요”(구두굽이 부러진 뒤 남편에게) 등 셀 수 없다.

은아라는 인물을 한결 풍성하게 하는 건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성질머리다. 그는 사돈 앞에서 내내 점잖은 척하다가 아들이 식기세척기를 돌린다고 하자 “네가 설거지 안 해도 돼!”라며 악을 쓰고 만다. 영미 앞에서 살림의 기본은 알아야 한다며 구관조 돌보는 법을 잘난 척하며 알려주지만, 정작 “모이는 어떻게 주느냐”는 물음에 “미세스 문에게 물어보라”며 꽁무니를 뺀다.

이렇듯 은아의 인기코드는 이중성이다. 장미희 고유의 우아한 이미지와 묘하게 중첩되며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김수현 작가는 “어떻게 연기하면 좋겠냐”고 묻는 장미희에게 “평소 말하던 대로 하면 거기에 맞춰 쓰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은아가 입는 고급 의상도 절반가량은 장미희 본인의 것이다.

#짜증내고 할 말 다 하는 엄마

방영 초반 김수현 특유의 긴 대사를 꼭꼭 씹어 넘기듯 중얼거리는 한자의 독백이 눈길을 끌었다. 20회가 넘은 지금은 독백보다 내색을 하는 횟수가 늘었다. 손자를 봐달라는 둘째 아들 내외의 부탁을 일언지하로 거절한 게 대표적이다. 조연출 이상욱 PD는 “한자는 ‘엄마는 뼈빠지게 일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라고 주장한다. 달라진 엄마 세대의 의식을 반영한 대목”이라고 말했다.

한자를 가장 뿔나게 한 사람은 은아다. 한자는 은아의 진주목걸이를 떠올리며 이렇게 혼자 짜증을 낸다. “무슨 진주알이 청심환만 하냐.” 딸이 사준 진주목걸이를 자랑스레 걸쳤던 그는 “차라리 하지를 말 것을”이라며 자책한다. 은아와 함께 식사한 한정식집에서 밥값 내겠다고 우기다가 한 달 반찬값 액수인 44만원이나 뜯기기도 한다. 그러고는 눈물을 쏟는다. “아까워 죽겠어… 아까워 죽겠어!”

한자 역시 이중성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게 캐릭터의 현실성을 높인다. 변호사 딸 영수(신은경)와 그가 좋아하는 이혼남 종원(류진)에 대한 태도가 그렇다. 그는 종원에게 “알 것 알 만큼 다 큰 애 안겨주는 게 무슨 사랑이냐”고 쏘아붙인다. 영수에게도 막무가내다. “엄마 친구 자식들 중에 변호사 없어. 나 너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잘난 체한다는 소리 듣고 살았는데, 고작 이혼남한테 보낸다고 해?” 한 가닥 자존심만은 지키고 싶다는 여자의 오기로도 읽힌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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