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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Story] 널뛰는 환율에 ‘정부 입방아’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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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2007년 12월 27일. 코스닥 상장사인 인지디스플레이는 ‘환 리스크 관리 최우수기업’ 표창을 받았다. 증권선물거래소·선물업계·선물학회가 공동으로 매년 환율 변동 위험에 가장 잘 대처한 중소기업에 주는 상이었다.

#2008년 4월 22일. 인지디스플레이는 파생상품 거래에서 큰 타격을 받았다고 공시했다. 달러화 강세로 자기자본의 8.1%(36억2600만원)에 해당하는 손실을 봤다는 내용이었다. 다음날 증시가 열리자마자 이 회사 주가는 6% 가까이 급락했다.

환 위험을 잘 관리해 표창까지 받았던 회사가 불과 넉 달 새 36억원이나 까먹은 연유는 무엇이었을까. 인지디스플레이는 매출의 70%가 수출이다. 환율 동향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환율이 1원 떨어질 때마다 매출이 2억원씩 증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업자인 정구용 회장은 환 관리엔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2005년 모회사인 인지컨트롤스에 삼성경제연구소 출신의 환 전문가를 스카우트했다. 사내에 ‘외환 리스크 관리위원회’도 만들었다. 그 덕에 그해 ‘환 리스크 관리 우수기업’으로 뽑혔다.

자신감을 얻은 정 회장은 인지디스플레이에도 같은 시스템을 도입했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2006년 초 1005.6원이던 원-달러 환율이 지난해 11월 초 902.2원으로 곤두박질했지만 이 회사는 끄떡 없었다. 달러 값이 떨어질 걸로 보고 미리 손을 썼기 때문이었다. 지난해에만 11억원의 환차손을 방어해 낸 건 물론이고 외환선물 거래로 12억원의 차익까지 챙겼다. 환 리스크 관리만으로 지난해 영업이익(49억원)의 절반과 맞먹는 돈을 벌었다. 이 성공 사례는 벤치마킹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인지디스플레이는 올해도 원-달러 환율이 떨어질 걸로 봤다. 달러 약세가 세계적인 추세였기 때문이다. 최규승 경영관리팀 과장은 “지난해 말 모든 국내외 연구소가 올해 환율을 달러당 910원대로 예상했다”며 “우리도 910∼920원을 기준으로 환 헤지를 했다”고 말했다. 거래 은행도 그렇게 권했다. 하지만 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달러당 900원마저 깨질 듯하던 환율이 넉 달 만에 1000원대로 치솟았다. 미국 신용위기로 외국인이 한국 주식을 팔아 대거 달러를 빼간 데다 국제수지마저 적자로 돌아선 탓에 달러 품귀 현상마저 나타났다. 여기에다 ‘환율 주권’을 주장하고 나선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의 발언도 환율 급등을 부채질했다. 지난달 17일엔 하루에 31.9원이 뛰기도 했다.

사방에서 ‘곡 소리’가 났다. 3월 이후 두 달 반 동안 네 건의 파생상품 거래 손실 공시가 나왔다. 이 공시는 파생상품 거래로 자기자본의 5% 이상 손해를 보면 하도록 돼 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이 구축된 1999년 이래 한 건도 없었던 공시다. 연말까지 가면 이런 공시가 얼마나 더 나올지 모른다. 상장된 중소기업 관계자는 “예상치 못한 환율 오름세에 골병 든 수출 중소기업이 한둘이 아니다”라고 푸념했다. 정부가 수출에 도움을 주겠다며 주장한 ‘환율 주권’이 되레 관련 기업을 옥죄고 있는 셈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와 은행은 서로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했다. 강 장관은 “은행이 수수료 수입에만 눈이 멀어 수출 기업에 무리하게 환 헤지를 하도록 부추겼다”며 은행을 비난했다. 이에 대해 은행들은 “환율이 어디로 튈지 어떻게 아느냐”며 “결과만 보고 은행을 비난하는 건 시장을 모르는 소리”라는 입장이다.

올 들어서만 10억원 이상 환 손실을 입은 어느 사장은 “수출대금을 달러로 받는 입장에선 환 헤지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토로했다. 그는 “수출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정부는 제발 외환시장을 요동치게 하지만 말았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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