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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에 온 의원들 사파리에만 흥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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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로 해외 시찰을 간 국회 한 상임위 소속 의원들이 스핑크스와 피라미드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당시 시찰단에 포함된 모 의원은 “우리의 경우 빡빡한 공식 일정 중 잠시 틈을 내 유적지를 방문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5년 5월 10일 오후 1시. 남미의 교통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의원 해외활동에 나선 우리 국회의원들이 페루 국회의사당에 나타났다. 이곳 국회 교통통신위원회 소속 의원들과 면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약속한 시간이 지나도 페루 의원들이 나타나지 않자 한나라당 의원 두 명은 자리를 떴다. 자크 아커만 교통통신위원장이 접견실로 들어오자 이강래(통합민주당) 의원은 “(남미) 3개국 중 페루를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 제일 먼저 방문하게 됐다”며 “우리 일행에는 야당인 한나라당 소속 의원이 두 분 계신데 장시간 위원장을 기다리다 지쳐서 갔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한국에서는 회의가 오래 지연되면 야당이 퇴장하기도 한다”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이에 아커만 위원장이 “내일 오전에 시간을 내준다면 행정부 측 인사나 다른 국회의원들과의 면담을 주선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 의원은 “내일 예정된 일정이 있어 고맙지만 사양하겠다”며 거절했다. 건교위의 해외활동 결과보고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당시 6명의 의원은 남미의 정책을 파악하기 위해 1억800만원을 들여 해외 시찰에 나섰다. 그러나 멍석이 깔리자 일부 의원은 자리를 떴고 행정부 인사와의 면담 기회도 거절했다. 결과보고서에는 다음날 아무 공식 일정이 없었던 것으로 나와 있다.

2007년 1월 12일 오전 11시. 이탈리아의 폴레나 하원 문화위원장은 한국에서 찾아온 권철현(한나라당) 의원 등 교육위 소속 의원 4명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인사말을 시작했다. 폴레나 위원장은 “(국회가) 폐회 중이라 준비가 부족하다. 죄송하다”고 양해를 구했다. 이탈리아 하원은 전년도 12월에 예산안 심의를 마치고 성탄절부터 1월 6일까지 휴일이었다. 당시 브리핑을 맡은 의회 관계자도 “오늘 미팅 준비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토로했다. 권 의원은 “한국에서도 폐회 중에 외빈이 방문하면 의원들 모임에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국회의원들의 해외 활동이 이처럼 꼬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 현역 의원은 “현지 정부나 의회 관계자를 만나는 공식 일정은 사실상 관광을 다니기 위한 ‘알리바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공식 행사를 위주로 해외 일정을 짜는 게 아니라 관광 계획을 먼저 세운 뒤 면피용으로 상대국 관계자와의 면담을 잡다 보니 뒤죽박죽되곤 한다는 것이다. 의원을 수행해 중동 지역을 방문했던 한 국회사무처 관계자는 “의원 면담이 취소돼 유적지만 보고 왔다”며 “나중에 알아보니 사전에 치밀하게 섭외가 안 된 것 같았다”고 말했다.

유럽에 근무했던 한 전직 대사는 “국회의원들이 방문국의 장관을 면담하려면 두 달 전에는 계획을 세워야 하는데 1주일 전에야 급하게 통보하니 일정을 잡을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한 외교부 관계자는 “구체적인 목표와 치밀한 계획이 없다 보니 마땅한 인물을 연결해 주기가 어렵다”며 “급하게 오다 보니 한국 국회의원 여러 명이 지방 시의원 한 명을 만나 이야기를 들은 경우도 있다”고 토로했다.

의원들의 마음이 공식 일정보다는 다른 데 쏠려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사람은 현지의 교민들이다. 중동 지역에 근무했던 한 상사 직원은 “국회의원 4명이 방문하며 상사 직원들과 면담을 하겠다고 했는데 막상 나가보니 피곤하다는 이유로 한 명만 나왔더라”며 “두 명은 공식 일정에도 빠졌다고 들었다”고 밝혔다.

아프리카에서 근무했던 KOTRA 관계자는 “본국의 국회의원과 면담하면서 교민들이 몇 차례 애로사항을 전달한 적이 있었지만 그들이 떠난 뒤 실제로 반영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페루의 한 주재원은 “국회의원들이 수도 없이 오지만 그들이 딱히 하는 일이 없어 별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유럽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는 한 교민은 “쓰레기 소각장이나 하수처리장 방문 일정을 억지로 끼워 넣은 것을 알기 때문에 ‘가기 싫으면 버스에서 내리지 말라’고 안내한다”고 말했다. 의원들이 종종 찾는 케냐의 한 교민은 “이곳 사람들은 한국에 관심이 많은데 의원들은 사파리에만 흥미가 있다”고 꼬집었다.

반면 생태·환경·문화유산 시찰 등의 명목으로 진행되는 현지 관광은 빡빡하게 진행된다. 2006년 이집트 카이로를 방문한 의원 4명. 도착 당일 오후 7시까지 카이로 박물관과 기자 피라미드를 시찰했다. 현지 한국인 관광 가이드가 동행한 것은 물론이다. 다음날 이들은 람세스 석상으로 유명한 룩소르에 도착했다. 현지 관계자는 “룩소르를 가려면 경비행기를 타거나 기차로 11시간을 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의원들은 이튿날 오후엔 그리스 아테네로 이동했고 미케네·코린트 지역 시찰을 강행했다.

선진 외국의 지방자치제도를 연구하기 위해 2005년 5월 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를 방문한 행정자치위원회 소속 의원들의 현지 일정표엔 베르사유 궁전, 개선문, 루브르 박물관 같은 명소들이 들어 있었다.
아테네의 한 현지 가이드는 “의원들은 패키지 여행을 오는 관광객과 똑같은 일정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프랑스 파리의 한 여행사 관계자는 “일정을 아예 비워 놓은 의원들도 있는데 이런 경우 대개 루브르 박물관이나 베르사유 궁전 같은 유명 관광지를 찾는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남미 지역의 한 전직 대사는 “한국에서 회기가 끝난 뒤 1, 2월께 국회의원들이 많이 찾아 온다”며 “아무래도 겨울에 따뜻한 남반구 기후를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의원들의 해외 활동이 ‘관광용’이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다 보니 여행업체가 봉변을 당하는 일도 생긴다. 북유럽 해외 활동 일정을 담당했던 한 여행사 관계자는 “2006년 말과 지난해 초에 선거관리위원회의 조사를 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모 의원의 여행을 담당한 것과 관련해 선관위 직원이 자료를 요구했다”며 “나중에 들어 보니 별문제가 없는 것으로 결론 났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해외 활동에 나서는 의원들이 부부 동반을 하는 이유도 관광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2007년 1월 행자위 소속 의원 4명은 ‘북유럽 선진국의 연금 등 사회보장 정책 파악’을 위해 노르웨이·스웨덴·핀란드를 방문했다. 그런데 취재팀은 경비 영수증을 확인하던 중 핀란드­­·러시아 간 열차에 이들이 한국인 여성 4명과 동승한 것을 발견했다. 여성들은 의원들의 부인으로 확인됐다. 당시 시찰에 참가했던 한나라당 정갑윤 의원은 “선거 때 부인이 고생하기도 했거니와 여자만 따로 해외 여행을 하는 게 쉽지 않다 보니 함께 가게 됐다”며 “부인 여행에 드는 비용은 개인이 부담한 만큼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의원들이 관광지를 자주 기웃거리면서 좋지 않은 목격담도 들린다. 뉴질랜드 한인회의 한 관계자는 “이곳을 찾은 한 의원이 술을 잔뜩 마시고 ‘카지노를 소개시켜 달라’고 해 내가 ‘교민들 시선을 봐서 참아 달라’고 말린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식당에서 국회의원들이 ‘대우가 좋지 않다’며 소란을 피우는 일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터키의 한 한인회 인사는 “한 의원이 호텔방이 마음에 안 든다며 행패를 부려 현지 여행사 사장이 자비로 300유로짜리 방을 잡아줘 진정시킨 적이 있었다”고 공개했다.
의원들이 올 때마다 ‘면담’을 해야 하는 것에 현지 한국인들은 피로감을 호소한다. 한 전직 이집트 주재원은 “의원들이 올 때마다 현장 책임자가 응대해야 하는 것이 귀찮다”며 “자원 부국인 이집트에 왔으면 자원외교를 해야지 피라미드나 보고 가는 게 무슨 외교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의원 활동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노르웨이에서 근무한 한 외교관은 “머나먼 북유럽까지 왔는데 그곳의 경치를 즐기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며 “의원들이 관광을 해서 좋은 영감을 얻고 가는 순기능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해문 전 그리스 대사는 “올림픽의 나라, 신화의 발상지인 그리스에서 관광을 하고 영감을 얻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주장했다. 페루를 다녀왔던 민주당 장복심 의원은 “그곳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고 입법활동에도 큰 도움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강래 의원은 “상임위 해외시찰을 공무원 출장과 똑같이 취급해서는 안된다”며 “현지 공관에서 못하는 역할을 의원들이 해내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국회 일각에선 지금 같은 해외활동보다는 주제를 명확히 정해 출국하는 방식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2005년 3월 문광위 소속 의원들의 유럽 ‘간판 문화’ 시찰을 좋은 예로 꼽는다. 당시 의원들은 방문국 대사와의 만찬을 취소하는 대신 시청·구청의 간판 담당 실무자를 만나는 등 내실 있게 활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별취재팀=나현철·강주안·고성표·이종찬·선승혜·이현택·정선언 기자·김기정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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