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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주말 산책] 추격자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9호 39면

지난 이른 봄날, 친구와 함께 전철을 타고 덕소에서 내려 서울로 강변을 거슬러 가는 원족을 했다. 점심을 먹을 때와 몇 차례 쉴 때를 빼고 좋이 세 시간 넘게 걸은 참이었다. 몰약 같은 음악을 흩뿌려 기분을 고양시키던 구리 강변의 스피커들도 어느덧 뒤로 멀어지고, 우리의 다리도 무거워졌다.

마침 한 아저씨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기에 우리는 그를 불러 세워 전철역 가는 길을 물었다. “한참 가야 하는데요.” 벌판 저편 띄엄띄엄 보이는 건물 중 한 곳이리라는 우리 짐작은 틀렸다. 곤혹스러운 얼굴로 전철역 가는 길을 설명하려 애쓰던 아저씨는 그것이 자기에게도 더 쉬운 답인 듯 손가락을 뻗어 앞을 가리켰다. “저기가 워커힐인데.” 우리는 탄성을 질렀다. “정말요!?” 그러자 그는 의기양양 말을 이었다. “그럼요! 저기 저게 아차산이고, 저게 광동교고.”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저래 봬도 꽤 멀 거야.” 동의했지만 불쑥 힘이 솟았다. 과연, 아차산 기슭 워커힐 호텔이며 강 건너 고층아파트들이며, 완연한 서울의 자태를 하나하나 알은체하면서 우리는 들뜬 기분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가에 바투 붙어 있는 바지선과 그 앞에 좀 전의 자전거가 보였다. 자전거 아저씨는 그 바지선의 인부인 모양이었다.

갈수록 길은 걸을 만하지 않았다. 쐐기풀이니 환삼덩굴이니 미국자리공 같은 황폐한 이름만 떠오르는 식물들이 바짝 마른 채 악착같이 뒤엉겨 덤불을 이루며 우리 걸음을 훼방놓았다. 광동교를 코앞에 두곤 길이 거의 끊긴 듯했다. 거기서 서너 대 차가 서 있는 갓길로 올라갈까 했지만 우리는 가는 데까지 가보기로 했다. 왼쪽으로는 낭떠러지 아래 강물이었고 오른쪽의 가파른 잡초밭에는 쓰레기봉투들이 버려져 있었다. 지나가는 차에서 던져졌을 쓰레기 사이에 큼지막한 헝겊가방이 보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가방을 지나쳤을 때 웬 남자 하나가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이상한 사람이네. 저 가방에 마약 들어있는 거 아니야?” 내 말에 친구가 돌아보며 찡그린 얼굴로 대꾸했다. “말조심 해!” 잉? 삐치려다가 나는 느낌이 이상해서 거의 입만 벙긋거리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 사람, 뒤에 있어?”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얼굴은 울상이 됐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아직 따라와?” “응. 네가 앞에 걷는 게 좋겠다.” 친구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뒤에서 머리채를 잡아챌 듯한 공포로 나는 두말 않고 친구의 앞으로 갔다.

완벽한 사각지대였다. 저 우뚝 솟은 망루에서도 안 보일 곳이다. 오른쪽도 왼쪽도 앞쪽도 막다른 벽, 뒤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를 도발할 게 겁나 뛰지도 못하겠으니 다급한 다족류처럼 재게 발을 놀릴 따름이었다. 콧속에서 마른 코피 냄새가 훅 끼쳤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 했거늘, 아, 왜 이 수렁에 들어섰던가!

드디어 앞이 막히고 나는 즉각, 수직에 가까운 낭떠러지를 타고 올랐다. 커다란 나무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그걸 죽어라 움켜잡으며 엉금엉금 기어오르니, 길 위였다. 꿈인가 생시인가. 덜덜 떨며 숨을 몰아쉬는데 뒤에서 친구가 낄낄거렸다. “너 도망가는 꼴 어찌나 웃기는지!” “저도 무서웠으면서!” “난 아니야.” 정말일까? 그 사람은 진작 강으로 내려갔다고 했다. “가방 갖고?” “응. 근데 너, 너만 살겠다고 나를 버리더구나.” 낯이 화끈해졌다. 사실 까마득히 친구를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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