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칼럼>스포츠도 관리하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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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지난달 31일 우리나라를 방문한 시티베니 람부카 피지총리를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 청와대 오찬에 초대했다.이 자리에서 자연스레 골프가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中央日報 스포츠난에 실린 대화록 일부를 옮겨보자.
피지총리=각하께서도 골프를 하시면 좋을 것입니다.얼마전 우리나라에서 각국 대사 친선골프가 있었는데 한국대사가 말레이시아에졌습니다.외교를 잘하려면 골프도 잘해야 합니다.
金대통령=아 글쎄,난 골프를 치지말라고 지시를 내린 적이 없는데(주위에 있던 한국측 참석자들을 가리키며)이 사람들이 골프를 안쳐요.
피지총리=골프를 금지하지 않았다니 무슨 말씀입니까.스포츠도 금지하고 안하고 합니까.
이 대화록이 가감없이 전해졌다는 전제 아래 두 가지 사실이 가슴 답답하게 전해진다.골프를 치지말라고 대통령이 지시한 적도없는데 공직자들이 알아서 치지않았다는 점,또 하나는 스포츠도 금지하고 안하느냐는 외국 총리의 의문제기다.문민 정부가 들어선지 2년반동안 대통령이 어떤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공직자들은 골프를 쳐서는 안된다고 지시를 내린 적이 없다.다만 새 정부 들어서 개혁과 사정 바람이 불면서 골프같은 사치성 스포츠나 공무원과 업자간 예상될 수 있는 골프장 비리는 척결돼야 한다는 운동권적 분위기와,대통령은 골프를 좋아하지 않는다는「감」이 합쳐져 공무원 골프 금지령으로 굳어졌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상 금지령이었음을 확인해주는 두가지 에피소드가 있다.민자당대표였던 JP가 어느날 몇몇 정치인들과 골프 나들이를 갔다가 괘씸죄에 저촉되었다는 가십이 신문에 난 적이 있고 새 정부 들어서 1년 안된 시점에 개각이 있 은뒤 첫 국무회의에서 한 장관이 골프해금(解禁)을 공식의제로 제기했다가 새 내각 첫날에 골프해금이라면 곤란하다고 흐지부지했던 적이 있었다.그후부터 골프 금지령은 사실상 전 공무원 사회에 지켜진 불문율이었다.
대통령이 치지말라고 지시한 적이 없건만 어째서 우리의 공직자들은 2년반이나 골프장에 얼씬도 하지 못했던가.물론 그동안 도둑질하듯 변성명해서 몰래 골프를 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왜 대통령이 지시한 적이 없고 규제 대상도 될 수없는 스포츠를 금지해서 공직자들을 도둑으로 몰았는가.
개혁과 변화가 시대적 소명이고 대통령의 흔들림없는 정치철학이라면 변화와 개혁을 위해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골프는 적어도 1년간 치지 말자고 공식적으로 제안할 수 있었다.그래서 혼연일체가 되어 개혁과 변화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공무원상을 보여주는 계기로 삼았다면 골프 금지령은 나름대로 성공적이고 의미있는 결정이었을 것이다.이도 아니고 그저 대통령이 골프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눈치와 분위기에 사로잡혀 2년반동안 사실상 골프금지령이 통용되는 공직사회 분위기였 다면 이게 바로 오늘 우리 정부의 경직성과 복지부동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상징물이 아닌가. 이번 여름,전직 대통령이 강원도 휴양지로 휴가를 갔다.군출신으로 지난날 전직대통령을 모신 적이 있다는 강원도 경찰청장이 그분과 골프를 쳤다.이 사실이 알려지자 며칠전 그 경찰청장은 전격 좌천됐다.오비이락(烏飛梨落)일수도 있지만 근 무중도 아닌 일요일에 골프를 쳤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자리는 바뀌었다.
대통령이 결코 지시한 적이 없건만 공직자가 골프를 치면 불이익을 당한다는 사실이 재확인되고 증폭되어 공직사회를 더욱 경직시킬 것이다.분수와 절도를 넘는 어떤 스포츠 나 레저도 바람직하지 않다.골프는 골프일 뿐이다.분수와 절도에 따라 해도 그만,안해도 그만이다.공직자든 시민이든 알아서 선택할 일이다.이 선택이 자유롭지 못하니 공직사회는 굳어지고 눈치만 본다.
골프의 마지막 비결은 힘을 빼는 일이다.개혁과 변화를 어깨와목에 힘만 준다고 잘되는 일이 아님을 지난 2년반 개혁정치에서절감했다.개혁과 변화도 유연성을 지녀야한다.골프금지령처럼 목에힘만 준다고 잘되지는 않는다.공직사회의 경직 성을 풀고 복지부동 아닌 솔선수범의 분위기 조성을 위해서 골프를 해금해야 한다.내일부터라도 총리나 청와대 비서실장이 골프회동을 한번 하면 2년반의 경직성이 풀릴 것이다.바야흐로 세계화시대다.「골프를 치라 말라 규제하나요?」라는 우문 (愚問)이 결코 나오지 않도록 세련되고 유연한 국정운영이 문민정부의 남은 과제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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