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리뷰>한국현대미술의 매체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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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요즘 들어 우리 미술계에 이상과열과 거품현상이 부쩍 심해진 듯하다.숱하게 벌어지는 전시와 행사들을 보면 더욱더 그런 인상이다.외양은 그럴듯하고 거창한데 비해 대부분 내실이 없고 소모적이다. 미술의 해 조직위원회 주최로 지난달 26일부터 3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최된 「한국현대미술의 매체전」(부제-공간의 반란)은 한국 현대미술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대규모 전시였다.
미술평론가 윤진섭(尹晋燮)씨가 기획하고 「공간의 반란」이란 부제를 단 이 전시는 67년 「청년작가연립전」에서부터 현재에 이르는 입체.설치.퍼포먼스등 이른바 실험미술의 족적을 담는,외형적으로 매우 거창한 행사다.그러나 30년동안 벌 어진 다양한경향의 작품들 위에 철저하게 검증되지 않은 불분명한 논지를 적용,해석함으로써 전시의 초점을 상실한채 잡다한 정보만 나열하는결과를 가져왔다.이 전시는 두 파트로 나뉘어 1실에는 60~80년대 작가들의 리메이크 작품과 자 료들이,그리고 2실에는 90년대 작가들의 다양한 면모가 작품 중심으로 전시됐다.
기획자가 카탈로그를 대신한 자료집 성격의 책자 서두에서 밝힌대로 1실의 60~70년대 작품들은 이번 전시기획의 초점인 실험성의 시원(始原)이나 되는 것처럼 의미를 부여했다.
또 90년대 작가들은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들로 취급해 이들의 작업을 과거세대를 극복한 새로운 감각의 선두주자로부각시키고 있다.그러나 기획자는 세대간의 상관성에 관한 면밀한논증없이 이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어 우선 논리적 타당성을 잃고있다.또 입체.설치.퍼포먼스의 개념에 대 한 명확한 규정도 없이 양식적 유사성에 의존한 단순논리로 시대별 연관성을 찾는 과오도 범하고 있다.
이는 마치 60,70년대의 해프닝이나 이벤트와 엄연히 구별되는 퍼포먼스를 단순하게 같은 맥락으로 보는 입장이나 마찬가지다.물론 한달 남짓한 준비기간을 통해 급조된 전시를 대상으로 심각한 이의를 제기한다는 것이 무리일 수는 있다.그 렇지만 기획자는 주어진 준비기간동안 소화가능한 범위내의 문제만 다루는 것이 정직한 일 아닌가.
이 전시는 어쨌든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면밀히 검토해야할 문제를 섣불리 취급함으로써 왜곡되거나 오해받을 소지를 많이 남기게 된 거품전시의 하나라는 인상을 떨칠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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