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야기마을] 영수증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9면

 문득 지갑을 여니 주황색 쪽지가 보인다. 쪽지를 받았던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린다.

지난해 이맘때, 화창한 봄날이었다. 2주 만에 만난 단짝 친구와 햇빛을 피해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쌓이고 쌓였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느라 냉커피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맨홀 뚜껑의 구멍에 하이힐 굽이 끼여 시내 한가운데서 난처했던 얘기, 바닷가 길에 서있던 밴 안을 들여다 보다 차 주인에게 혼난 얘기…. 친구의 얘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그런데 입안에서 얼음 굴려가며 정신없이 떠들던 친구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턱으로 누군가를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 저 남자가 아까부터 너를 자꾸 쳐다본다.” 커피를 주문받은 남자 종업원이었다. 진작부터 나도 이상한 눈길을 느껴왔던 참이었다. 친구의 말을 들은 뒤 슬쩍슬쩍 그 남자의 얼굴이며 키·차림새 등을 살펴보니 그런대로 괜찮았다.

수다를 끝내고 커피숍을 나올 때였다. “저기….” 낯선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속으로 “흠, 올 게 왔군”하며 최대한 목에 힘을 주고 도도한 표정으로 돌아봤다. 그 남자가 주황색 쪽지를 들고 머쓱하게 서 있었다.

나는 “저 남자 친구 있어요” 하고는 한껏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머뭇거리던 남자는 내게 그 쪽지를 쥐여주고선 후다닥 가게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어서 펼쳐보라고 친구가 채근했지만 무심한 체하며 쪽지를 가방 안에 던져넣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잽싸게 가방을 열었다. 손이 떨렸다. ‘그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겠지’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했다. 그런데…. 쪽지를 펼쳐본 나는 ‘뒤집어’졌다. 그가 용기를 내어 내게 쥐여준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이스 카페 아메리카노 3500원’….

사실은 이랬다. 용돈 관리를 잘못하던 나는 용돈기입장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뭔가를 주문할 때마다 영수증을 꼭 챙겨 달라고 요구했다. 그 커피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달라고 해놓고 챙기는 걸 잊어버렸던 것이다. 부끄러움에 몸서리를 쳤다. 그 뒤 친구는 쪽지에 뭐가 적혀 있었느냐며 집요하게 물어 왔지만 나는 차마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그 뒤로 남자가 쪽지를 건네줘도 ‘김칫국부터 마시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김희정(22·대학생·부산시 해운대구 좌동)

5월 9일자 주제는 프로 야구

■분량은 1400자 안팎. 성명·주소·전화번호·직업·나이를 적어 5월 5일까지로 보내 주십시오. 채택된 분께는 원고료를 드리며, 두 달마다 장원작 한 편을 뽑아 현대카드 프리비아에서 제공하는 상하이 왕복 항공권 및 호텔 2박 숙박권을 제공합니다.

■3, 4월 장원으로 3월 28일자에 실린 이희윤씨의 ‘발가락을 잘라야 해 -_-;; ’를 선정했습니다. 제세공과금은 본인 부담입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