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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제 12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가랑이 밑을 기어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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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결승 3번기 제3국>
○·박영훈 9단(1승1패) ●·이세돌 9단(1승1패)

제8보(78∼81)=“두점머리는 죽어도 두들겨라” “쌈지 뜨면 지나니 대해로 나가라”-. 이런 기훈들 속엔 기세가 살아 숨쉰다. 바둑은 기세의 게임. 죽으려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얼마나 꿋꿋하고 아름다운가. 하지만 바둑은 다양한 현실을 내포하고 있고 현실은 대체로 가혹하다.

박영훈 9단은 ‘참고도’ 백1로 밀어 중앙으로 나가고 싶다. 그러나 검고 칙칙하게 도사리고 있는 흑▲들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저 시커먼 동네로 나가 무슨 낙이 있을까. 더구나 그의 발목을 잡는 것이 우하 백의 형태다. 이세돌 9단은 그 약점을 보고 틀림없이 2로 꼬부려 올 것이다. 백3으로 막으면 흑4로 하나 젖혀두고(이때 백은 A로 뛸 수 없다. 그대로 포위되기 때문이다) 5를 확인한 뒤 6으로 끊는다. 그 다음 8로 젖히면 백은 응수가 두절된다. B로 젖히면 C의 이단젖힘이 괴롭다. 하변이 무너지면 백은 무슨 수로 흑의 실리를 당할 것인가. D의 절단도 발등에 불이다.

고심하던 박영훈이 78로 이었다. 고통이 절절이 밴 후퇴. 79로 막자 80으로 패망선을 타고 넘어간다. 가랑이 밑을 기어간 한신처럼 바닥을 기어 넘어갔다. 잔인한 현실을 인정하고 그는 후일을 기약하고 있다. 23세 청년의 인내가 처절하게 다가온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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