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증’보자는 대한민국 … 프라이버시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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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벌이 주부 강미애(37·서울 구기동)씨는 얼마 전 미국 전자상거래 사이트 ‘이베이’에서 둘째 딸의 천 기저귀를 구입했다. 물건 사는 데 제공한 개인정보는 신용카드번호가 다였다. 강씨는 “국내 쇼핑몰에서 물건을 살 때와 달라 의아했다”고 했다.

국내 상거래 사이트에서 물건을 사려면 대개 이름·주민등록번호·주소·전화번호 등을 입력하고 회원 가입부터 해야 한다. 물건을 고른 뒤 신용카드번호를 넣는 건 기본이다. 환불해 줄 때 필요하다며 주거래 은행 및 계좌번호를 요구하는 경우도 많다.

이렇듯 개인정보를 넘치게 요구하는 관행이 기어코 사단을 불렀다. 오픈마켓 옥션의 2월 해킹 사건으로 1081만여 회원 이름과 주민번호가 유출된 것. 개인정보가 노출된 회원들은 보이스 피싱, 주민번호 도용 사기 같은 2차, 3차 피해를 당할까 전전긍긍한다. 그중 100만 명은 주민번호 외에 은행 계좌번호까지 노출됐다. 옥션 회원인 박종성(46·서울 여의도) 씨는 “주민번호는 평생 따라다니는 고유번호인데 앞으로 어떤 범죄에 악용되지 않을까 불안하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은 막말로 ‘매일 민증 까는’ 사회다. 상거래 사이트는 물론 일반 기업의 고객 사이트마저 회원 가입 없이는 제품에 관한 질문을 올리거나 각종 온라인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 3100만 명이 가입한 국내 최대 검색 포털 네이버도 가입 때 이름과 주민번호·e-메일 주소를 묻는다. 이렇다 보니 우리나라 인터넷에는 수많은 개인정보가 둥둥 떠다닌다. 그중 핵심은 주민번호다.

그 자체로 지극히 개인적인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번호만으로 성별과 나이·생일이 드러난다. 더 큰 문제는 이 번호가 한국에선 어떤 사이트나 개인정보에라도 접근하는 ‘만능 열쇠’ 라는 점이다. 주민번호만 알면 개인 병력(病歷)은 물론 자동차 구입 이력, 보험 가입 상황 등 수많은 공공 정보를 알 수 있다. 공공기관과 기업들이 주민번호 확인을 개인 신분 확인의 안전판으로 여기는 까닭이다. 일반인들은 기억하기 쉽다는 점 때문에 주민번호를 이리저리 조합해 각종 사이트 ID나 비밀번호로 활용하곤 한다.

이렇다 보니 한국인의 주민번호는 각종 불법 취득 정보 가운데서도 비싼 값에 거래된다. 활용도가 높기 때문이다. 중국 불법 거래 사이트에서 한국 주민번호의 단가는 70원. 주소·계좌번호 같은 부가 정보가 더해지면 값은 더 올라간다. 몇 년 전부터는 아예 인터넷에 ‘주민번호 생성기’라는 소프트웨어가 공공연히 통용된다.

노출 부작용이 이토록 심한 주민번호를 각 기업과 인터넷 사이트들이 앞다퉈 요구하는 이유는 뭘까. 법무법인 지평의 이은우 변호사는 “고객 관리와 정보 수집이 용이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주민번호가 있으면 성별·연령별로 각종 고객 정보를 분류해 관리하거나 이를 마케팅에 활용하기 쉽다는 것이다. 이 변호사는 또 “성인 사이트의 경우 미성년자 접속 방지를 위해 주민번호 입력을 요구한다는데, 오히려 청소년들이 부모 등 성인의 주민번호를 도용해 이들 사이트에 ‘안전하게’ 접속하는 길을 열어준 것”이라고 비판했다. 악성 댓글 방지를 위해 인터넷 실명제가 필요하다지만, 실명제를 실시한 뒤에도 악성 댓글 수는 그다지 줄지 않았다는 업계 지적도 있다.

KAIST 경영대학원의 문송천 교수는 “주민번호는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와 중국·이스라엘·팔레스타인·싱가포르 등 8개국에만 있는 드문 제도”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와 유사하게 복지번호를 부여하는 스웨덴도 광범위한 사회보장제도 관리를 위해서만 이를 활용한다. 또 기업이 특정 개인정보를 수집하려면 그 내용을 일일이 정부에 신고해야 한다. 프랑스의 중앙주민등록시스템에도 개인 식별 번호가 있지만 시민이 스스로 요청할 때만 부여한다. 미국의 경우 무작위 추출된 숫자로 만든 사회보장번호가 있으나 이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비스를 거부하면 처벌을 받는다.

진보네트워크의 장여경씨는 “정부와 기업이 개인에게 주민번호 등 과도한 개인정보 공개를 요구하면서도 이를 보호하려는 노력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표 참조>

그는 “정부가 주민번호의 폐해를 줄이려는 취지로 2006년 주민번호 대체 수단인 아이핀(i-PIN) 제도를 시행했지만 이 역시 대중화할 경우 고유번호의 일반적 문제를 피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문송천 교수는 “우리나라 개인정보 유출의 근본 원인은 주민번호의 남용인 만큼 이를 덜 사용하는 것이 최선”이라며 “제도를 유지하더라도 선진국 사회보장번호처럼 사고 발생 때 민원에 따라 변경 가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정보화 시대의 프라이버시 보호 측면에서 주민번호 제도의 효용성을 다시 따져볼 수도 있겠다”고 덧붙였다.

이나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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