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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통령, 한·일관계 ‘실용적 접근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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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명박 대통령이 김윤옥 여사와 함께 21일 오후 일본 왕궁을 방문해 각각 아키히토 일왕, 미치코 왕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 대통령은 간접적으로 일왕의 방한을 권유했다. [사진=김경빈 기자]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과거사’란 이름의 분화구가 존재한다. 이 분화구가 미동이라도 하면 평소에 잠잠하던 대한해협은 일거에 긴장과 갈등의 바다로 둔갑한다. 과거사 문제는 역대 위정자에게 늘 뜨거운 감자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솔직했다. 21일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총리와의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과거사 문제에 관한 질문을 받자 “그 질문이 안 나왔으면 했는데…”라며 운을 뗐다. 그러곤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한·일 관계는 먼 역사를 우리가 항상 기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거에 얽매여 미래로 가는 데 지장을 받아서는 안 된다.” 더 보태거나 뺄 것이 없는 모범답안이었다. 전날 밤 재일 동포들과의 리셉션에서는 “과거는 잊을 수 없지만 과거만 갖고 오늘을 살고 더더욱 미래를 살 수 없다”고 말했다.

실은 이 대통령의 전임자들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과거를 직시하되 그에 얽매이지 않는 ‘미래 지향의 한·일 관계’는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서명한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의 기본 정신이다. 하지만 현실의 양국 관계는 2000년 역사교과서 파동으로 정반대의 방향으로 굴러갔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은 한걸음 더 나아가 “내 임기 중에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하지만 ‘한·일 우정의 해’로 지정됐던 2005년 노 대통령은 일본과의 ‘외교 전쟁’을 선포했다. 원인은 모두 과거사 인식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재임 중 5년 연속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다.

또 한번 ‘미래지향’을 표방하고 나선 이 대통령을 맞는 일본 분위기는 역대 어느 대통령 때보다도 환영 일색이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많은 부분을 일본의 몫으로 남겨뒀다. “역사 인식에 대한 문제는 일본이 할 일”이라고 분명히 했고 “일본에 만날 사과하라고 요구하지 않겠다”고도 했다.

또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에 대해서도 “정치인은 가끔 거북한 발언을 하지만 일일이 민감하게 대응할 필요는 없다”며 대범한 태도를 취할 뜻을 비췄다. 지난 시절 다람쥐 쳇바퀴처럼 반복돼 온 과거사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지는 이제 일본의 태도 여하에 달린 셈이다.

이명박-후쿠다 회담에서 눈에 띄는 것은 ‘실용’적인 접근법이다. 정치 바람을 상대적으로 덜 타는 경제 협력을 강화하고 인적 교류의 저변을 넓히는 방안이다.

28개 조항으로 이뤄진 정상회담 합의문은 세세하고 실무적이다. 한국에 ‘부품·소재 전용공단’을 설치해 일본 기업 투자를 촉진하고 에너지·환경 기술을 교류하기로 한 것이 그 예다. 워킹홀리데이 제도를 연간 1만 명까지 확대하고 대학 차원에서 이뤄져 온 유학생 교류를 정부가 지원키로 한 것도 미래에 대한 투자다.

두 정상은 과거사에 발목 잡혀 있기에는 두 나라가 당장 힘을 모아 할 일이 많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보인다. 남은 과제는 실천의 몫이다.

글=예영준 기자 ,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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