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진시시각각

박정희·김대중·부시의 눈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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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한국 정치에 갑자기 눈물이 많아졌다. 어느 대통령 후보는 눈물을 TV 광고에 썼다. 어느 노(老)정객은 대선에서 패할 때마다 울었다. 이번에는 선대본부장과 부둥켜서 울었다. 경선 때는 여성 후보를 지지했던 남자 의원들이 패배에 울었다. 여성 후보는 “제가 남자들을 많이 울렸군요”라고 말했다. 총선에도 눈물이 많이 흐른다. 출마를 놓고 밤새워 고민했던 대통령의 형이 울었다. 12년간 자신을 뽑아준 시장 상인들에게 낙선 인사를 하며 대통령의 2인자가 울었다. YS(김영삼)와 함께 5공 독재에 맞섰던 박근혜파 중진도 울었다. 자신이 설득해 박근혜파가 된 이들이 줄줄이 낙천되어 미안하고 억울하다며 울었다. 세상풍파를 헤쳐온 나이 많은 이들이 그렇게 울었다.

대장부는 어버이의 죽음에만 울어야 한다고 선현들은 말했다. 많은 이들 사이에서 뽑혀 선거라는 전쟁에서 이겼으니, 국회의원은 현대판 대장부다. 그런 장부들이 울었다.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 했는데 어찌 그들의 비분강개(悲憤慷慨)를 모를까.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어찌 측은하지 않을까. 그러나 왜 그럴까. 정치인의 눈물을 보는 마음이 이상하게 허전하다.  

1974년 8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은 친북 재일교포 청년의 총탄에 부인을 잃었다. 사랑하고 존경하던 여인이었다. 19일 영구차는 하얀 국화로 덮였다. 청와대 정문에서 영구차와 이별하면서 독재자 박정희는 울었다. 국민이 TV로 지켜보는데 그는 울었다. 지아비의 눈물이었지만 동시에 한민족의 눈물이었다. 부부를 영원히 갈라놓아버리는 그 지독한 남북대결의 피눈물이었다.

80년 5월 신군부가 DJ(김대중)를 체포하자 광주가 궐기했다. 광주가 피로 물들 때 DJ는 감옥에 있었다. 광주가 평정된 후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곤 미국으로 떠났다. 광주에서 죽은 이들과 DJ가 처음 만난 건 7년이나 지난 87년 9월이었다. 김대중 민주당 고문은 망월동 묘역에서 울었다. 유가족을 부둥켜안고, 얼굴을 찌그러뜨리며, 꺼억꺼억 울었다. DJ의 눈물은 자신의 눈물도, 광주시민의 눈물도, 호남인만의 눈물도 아니었다. 민주화 투쟁에서 스러져간 모든 이의 눈물이었다. 수천 년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재를 해야 했고 그 독재에 신음해야 했던 한국의 눈물이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 무역센터 쌍둥이 건물이 무너졌다. 부시 대통령은 며칠 후 현장을 찾았다. 텍사스 카우보이 부시는 울었다. 언제나 싱글벙글 웃던 부시는 울었다. 그 눈물은 부시의 눈물이 아니었다. 불길을 피해 80층에서 뛰어내렸던 이들의 눈물이고, 그런 이들을 비명을 지르며 지켜봐야 했던 시민의 눈물이며, 무너질지도 모르는 건물로 묵묵히 들어갔던 경찰과 소방관들의 눈물이었다. 그리고 사상 최대의 번영 속에서 지독한 증오와 마주쳐야 했던 미국의 눈물이었다. 종교에 구원받기는커녕 종교에 심장이 찔린 인류의 눈물이었다.

정치 지도자들은 광장에 나온 사람이다. 각자의 뒷골목에서 공력(功力)을 쌓은 뒤 유권자의 추천을 받아 광장에 나온 사람이다. 그 광장의 이름은 지역구요 공동체이며 국가다. 그들은 피와 땀과 눈물을 자신이 아닌 공동체에 약속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광장 사람들은 눈물조차도 개인을 넘어야 한다. 역사나 공동체와 엮여야 한다.  

공동체에는 낙천이나 낙선보다 끔찍한 일이 많다. 못사는 사람들은 태풍에 집을 잃어버린다. 직장을 잃은 아버지는 소식이 없고 어머니는 집을 나간다. 낙천이나 낙선에 울 거라면 소년소녀가장은 백 번도 울었다. 대선과 총선에서 눈물을 흘렸던 광장 사람들의 인간적인 아픔을 어루만져 주고 싶다. 그리고 그들의 인생에서 다시는 그렇게 울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다시 울 때는 새로운 눈물이었으면 한다. 뒷골목이 아니라 광장의 눈물 말이다. 눈물이 역사가 되고 역사가 눈물이 되는 그런 눈물 말이다. 박정희·김대중·부시처럼.

김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