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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붉은악마 테헤란 응원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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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축구 100년 사상 최초로 전세기 원정 응원이 벌어진 17일 아테네올림픽 아시아 예선 이란전.

'여성은 경기장 입장이 안 된다''된다'는 곡절 끝에 '붉은 악마' 여성 응원단 40여명이 테헤란 아자디 스타디움에서 "대~한민국"을 외쳤다. 그중 한 사람인 윤은정(23.대학생)씨의 원정 응원기다.

# 17일 14:20(현지시간) 이란 테헤란공항

여기가 테헤란이구나. 우리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공항을 둘러봤다. 중동 국가가 낯설기는 20여명의 김덕수 사물놀이패나 대한축구협회 직원 30여명도 마찬가지. 전날 서울 시내 찜질방에서 밤을 지새우고 9시간30분 걸려 날아왔지만, 드디어 '고지'에 왔다고 생각하니 기운이 솟는다. 입국 전부터 이란 측이 "여자는 머리와 목을 드러내지 말라"고 누누이 당부해 비행기에서 만반의 준비를 했다. 먼저 태극기를 머리에 쓰개치마처럼 쓰고 그 위에 붉은 악마 머플러를 둘렀다.

# 15:30 테헤란 아자디 스타디움

응원단 전용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이란 경찰이 우리를 호위한다. 남자와 여자를 따로 줄 세워 서로 다른 입구로 인도한다. 김덕수 사물놀이패가 맨 앞에 앉고 남자 응원단은 바로 그 뒤쪽에 자리잡게 했다. 여자 응원단과 이란 여성 교민들은 경찰의 지시에 따라 맨 뒤쪽에 앉았다. 경찰 서너명이 그 사이에 서서 라인을 넘지 못하게 통제했다. 화장실 갈 때도 여자들은 서너명이 함께 움직여야 했다. 교민 한 분은 "이란에서 산 지 10여년 만에 경기장 안에서 여자 보긴 처음"이라고 말했다.

# 16:00 이란-한국전 시작

"대~한민국!" "오~ 필승 코리아!"

우리 응원소리에 경기장이 떠나갈 듯하다. 김덕수 사물놀이패도 신이 났다. 12만명 규모라는 스타디움은 의외로 한산했다. 3만명 남짓한 이란 사람들은 장내 아나운서의 응원 구호에 호응하기보다는 우리들의 열광적인 응원이 신기한 듯 바라본다. 전날 폭설이 내려 좌석 곳곳에 눈이 남아 있고 기온도 싸늘했지만 응원 열기에 추운 줄 몰랐다.

후반 16분 이천수가 눈 깜박할 새 슛을 날린다. 골이닷! 다들 난리가 났다. 여자들끼리 서로 부둥켜 얼싸안고 날뛰었다. 흥분해 뛰는 사이 머플러 히잡이 벗겨지려고 한다. "벗겨지면 안돼, 경찰에 끌려가!" 히잡을 도로 썼다.

# 18:00 한국, 이란에 1-0 승리

경기가 끝났다. "경기장 입장이 안 될지 모른다"는 통지를 받고도 테헤란행을 고집한 보람이 있다. 경기장을 빠져나오자 테헤란 시민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서툰 영어로 손짓 발짓 해가며 말을 건다. '아, 태극기 히잡을 달라는 소리구나.'머플러와 태극기를 아낌없이 나눠줬다. 테헤란 시민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너희가 이겼어!'

정리=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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