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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노인들 "음악에 살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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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지난 12일 저녁 7시 베를린의 3대 오페라 하우스의 하나인 도이처오퍼 입구.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백발이 성성한 70∼80대 노인들이 짝을 이뤄 젊은 관객들과 나란히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이날의 공연 프로그램은 19세기 이탈리아의 대표적 오페라 작곡가인 쥬세페 베르디(1813∼1901)의 메사 다 레퀴엠 (죽은 자를 위한 미사곡). 작품 성격상 여생이 얼마 안남은 실버(노년)관객들이 즐겨찾지 않을 것이란 기자의 생각은 그야말로 선입견이었다.


경연대회에 참가한 독일 오덴키르헨 노인합창단(左)과 도이체 오퍼에서 오페라를 관람하고 나오는 뤼네베르크 외르그씨 부부. [베를린=유권하 특파원]

1885석의 공연장 자리 중 40%가량이 실버관객으로 채워졌다. 공연이 끝난 뒤 자리를 떠나는 노인 관객들 두서너명의 옷깃을 잡았다.

에델(78)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할머니는 "나이가 들수록 엄숙한 종교음악에 마음이 끌린다"면서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지팡이를 꽉 잡고 옆자리에 서 있던 헬무트(84)는 "특히 출연자가 100명이 넘는 베르디의 레퀴엠을 듣고 나면 그 웅장하고 극적인 장면이 며칠간 내내 머릿속에 머무르며 감동을 준다"고 한마디 거든다. 실제 나이보다 10여년은 젊어 보이는 뤼네베르크 외르그(68)는 "50대 후반 직장에서 은퇴한 뒤 한달에 두서너번은 음악회를 찾는다"면서 "삶의 활력을 찾는 데 음악만큼 좋은 약은 없는 것 같다"면서 환하게 웃었다.

도이체 오퍼의 알렉산더 부셰 언론담당관은 "60대 이상 노인 관객은 오페라하우스의 매우 중요한 고객층"이라고 설명했다. 극장 측은 지난해 관람객 수를 2002년보다 3만4000여명 더 늘어난 28만4000여명로 집계했는데 그 중 60대 이상 노년층이 30%가량 차지할 것으로 추산했다. 노인들의 경제사정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수치다. 평균 한달에 600~700유로(100만원 가량)의 빠듯한 연금생활을 하는 노인층이 선뜻 한번에 30-50유로(중하위 등급 객석)를 내고 관람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가시간에 독일만큼 실버계층의 음악참여 활동이 적극적이고 다양한 나라도 드물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노년(Senioren)이라는 검색어를 쳐 넣으면 실버층을 유혹하는 각양각색의 음악활동 동호회가 새 회원을 뽑는다는 공고가 넘쳐난다. 그 가운데서 특히 합창단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독일 대다수 지역에선 마을마다 실버합창단이 조직돼 있다. 이들은 각 연방주와 전국 규모의 합창대회에 참여하거나 상호교류를 통해 친목을 다진다. 해외원정 연주회도 심심치 않게 열린다.

독일 중부 도시인 빌레펠트시 노인합창단의 경우 50여명의 단원은 병원에서 환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연주나 자선행사에 자주 불려간다. 지휘자인 롤프 자베르트는 "노래를 부르며 기뻐하고 많이 웃기 때문에 노후 건강에 큰 보탬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부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주의 작은 도시 오덴키르헨의 실버합창단도 왕성한 활동으로 주목받고 있다. 60~90대 노인 50여명으로 구성된 합창단은 시의 문화행사 연주를 도맡고 있으며 정기적으로 인근 도시에까지 원정연주에 나선다. 대외업무를 담당하는 헨니 숄츠는 "단원들의 실력을 높이기 위해 꾸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면서 "최근에는 연방주의 합창협회로부터 합창단의 연주 실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기도 했다"고 의욕을 보였다.

노인합창단의 전통은 옛 동독지역인 캠니츠시에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캠니츠 주민연대를 위한 노인합창단'이란 긴 이름을 갖고 있는 합창단의 평균연령은 76세. 70여명의 합창단원은 매주 두시간의 강도 높은 연습에 빠짐없이 참석해 실력을 다지고 있다. 지휘자인 롤프 슈퇴켈은 "최고령자가 90세인데 단원 대부분이 지각 한번 없이 개근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베를린=유권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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