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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한국현대사>40.사회주의系독립운동가 金山 上.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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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광복 50돌을 맞이해 정부수립후 최대규모인 1천4백42명이 새로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았다.이중에는 이데올로기 문제로 그동안 포상에서 제외됐던 이동휘(李東輝)선생등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도 포함됐다.그러나 아직 남북 어디에서도 올 바로 평가받지 못하는 잊혀진 독립운동가들이 많다.특히 중국 국민당이나 공산당적을 가지고 항일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은 낯설기만 하다.독립운동사의 폭과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활동을 복원하고 재평가하는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이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아리랑』의 주인공으로 친숙한 김산과 주변인물의 활동을 2회에 걸쳐 소개한다.한민족철학자대회 참석차 내한한 최용수(崔龍水.중국중앙당학교)교수는 10년간 김산 관련 자료수집를 위해 베이징(北京).광저우(廣州) 등을 답사한 이 분야의 최고 권위자다. [편집자註] 미국 여류작가 님 웨일스의 『아리랑』으로 인해 잊혀졌던 비운의 혁명가 김산(본명 張志樂)은 다시 널리 알려지게 됐고,그 파란곡절의 일생은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그러나 광저우(廣州)혁명열사릉원에 있는 한국인희생자 위령비에새겨 진 『중국과 한국 양국 젊은이들이 전투를 통해 맺은 우의는 만고장청(萬古長靑)할 것이다』는 문구처럼 김산외에도 수많은젊은이들이 항일운동에서 희생됐다.광저우.베이징(北京).옌안(延安)에서 활동할 시기 김산의 주변인물을 통해 이들 활 동의 일부분이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김산이 중국에서 평생의 동지들을 만나게 된 첫 계기는 1927년 12월11일에 폭발한 광저우봉기였다.광저우봉기는 1차국공(國共)합작이 깨지고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정부가 군벌들을 지원해 공산당을 탄압하자 이에 대항해 일으킨 공산 당의 무력봉기였다.이때 1백50여명의 한국인이 희생됐다.
김산은 봉기과정에서 오성륜(吳成崙).김성숙(金星淑).양림(楊林)등 많은 조선인혁명가와 만났다.
그중 김산은 오성륜과 김성숙을 가장 밀접한 두 친구로 꼽았다.세사람은 경력은 서로 다르지만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투신해 의열단(義烈團)에 참가했고 『중국혁명은 조선독립의 첫걸음』이라고 판단,중국혁명에 참가해 中.韓 두나라 를 위해 많은기여를 한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이들의 일생은 조국의 운명과 같이 비극이 연속되는 슬픔이 가득 찬 일생이었다.
김산과 오성륜은 처음부터 광저우봉기에 참가해 마지막까지 같이했다.두 사람은 피흘리며 진지를 고수했고 서로 도와 굶주림과 질병을 이겨내면서 살길을 찾던 구사일생의 친구였다.28년 김산은 베이징으로,오성륜은 만주로 제갈길을 간후 다시 는 만나지 못했다.그러나 40년 1월 일본군에 잡혀 변절한 오성륜은 일본놈 앞잡이가 되어 관동군부대에서 특무로 활동해 파란만장한 일생에 오점을 남겼다(45년 사망).
김산이 자기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준 사람』이라고 말한 김성숙은 임시정부요인으로 한국에도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광저우봉기 실패후 김산과 김성숙은 상하이에서 다시 만났다.당시 그는많지 않은 원고료 수입으로 상하이에 모이는 조선 혁명자들을 도와줘 건강을 회복하게 하고 또 다시 전선으로 나가도록 해주었다. 36년 봄 김산은 상하이로 가 김성숙과 박건웅(朴建雄)을 만났다.이들은 조선독립운동단체의 책임자들을 만나 토의한 끝에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했다.후에 중칭(重慶)임시정부에 참가하게되는 박건웅은 광저우봉기 시절부터 김산과는 가까운 친구사이였다. 그해 8월 김산은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추천을 받고 중국 서북지방 소비에트구역을 찾아갔다.김산은 바오안(保安)을 거쳐 옌안에 도착해 옌안주재 조선민족해방동맹의 대표가 됐다.이 시기에 김성숙이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내 김산의 활동을 탐문 할 정도로두 사람은 오랫동안 우의를 유지했다.
김산은 대포전문가로 이름을 날린 양달부(楊達夫.본명 楊林)도광저우봉기때 만났다.김산은 그를 『훌륭한 지하조직자이자 군인』이라고 찬양했다.楊은 광저우봉기때 포병연대지휘관으로 임명된 대포전문가로 포술에 능숙할 뿐만 아니라 국민당부대 의 장교들과도익숙해 영향력이 큰 조선인 혁명가였다.김산은 1927년 12월11일 저녁 楊을 만나 광저우봉기 지휘부본부를 방문하기도 했다. 28년 베이징에 온 김산은 중국공산당 베이핑(北平)시 조직부장으로 활동했다.이때 김산의 활동에 대해 당시 베이징여자사범대 당지부 서기였던 유령(劉玲.본명 齊淑容)은 『김산이 베이핑에 도착해 당조직을 정돈하면서 우선 당의 기율을 틀 어쥐기 시작했다.베이징여자사범대학의 당원들을 모아놓고 비밀공작방법을 가르쳐 주었다.때로는 광저우봉기에 관한 이야기도 해주었다.따라서당원들의 존경을 받게 됐다.서로 내왕하면서 느낀 것은 근면하고마르크스주의 서적을 많이 보아 이론수 준이 높고 연설도 잘했다.언제나 옷차림이 깨끗하고 항상 양복을 입고 다녔던 것이 인상깊다』고 회상했다.유령은 『아리랑』에도 기록돼 있는 김산의 첫연인이다.주변사람들은 두 사람을 부부관계로 볼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김산은 30년 4월 「5.1국제노동절」준비회의에 참가하고 나오는 길에 경찰에 잡혀 신의주로 압송됐다.그는 31년 4월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돼 베이징으로 돌아왔지만 이때부터 더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석방된후 김산은 구금 기간이 짧아 공산당으로부터 『전향한 것이 아닐까』하는 의심을 받아당조직과의 관계를 차단당했던 것이다.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당적을 회복하지 못했다.
님 웨일스라는 탁월한 기록자가 옌안(延安)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김산은 그의 다른 무수한 동지들처럼 역사의 뒤편에 묻혀버렸을 것이다.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이 이뤄진 것은 37년 5월.
이때부터 3개월간 그녀는 김 산과 20여회 만나 구술을 받았다.그녀는『중국의 붉은 별』로 유명한 에드가 스노와 32년 결혼했고 신문기자로 활동하며 37년 중국공산당 주요간부들을 취재하기 위해 옌안에 왔다 김산을 만났다.그녀는 오랜기간을 격변하는아시아에서 보내면서 중국과 한국에 관해 많은 집필을 했다.
웨일스가『현대의 정신을 소유한 실천적 지성』이라고 격찬한 김산은 1905년 평안북도 용천(龍川)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20세때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그는 입당전 만주의 조선독립군 군관학교(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한때 상하이 (上海)에서 안창호(安昌浩).이동휘(李東輝)등과도 교류를 가졌다.
1925년말 그는 광저우(廣州)에 있는 황포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는 한편,후에 쑨원(孫文)대학으로 바뀌게 된 학교에서 경제학과 사회발전의 역사를 공부했다.27년 12월 김산은 광저우봉기(廣州蜂起)에 참가했으며,공산당이 패배한 뒤에 는 테러가 난무하는 와중에서 빠져나왔다.
28년 9월 천신만고끝에 홍콩을 거쳐 상하이로 돌아온 김산은곧 베이징(北京)으로 가 베이징 지구당 조직부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30,33년 경찰에 체포돼 신의주로 압송됐다가 얼마되지않아 석방됐다.이 구금기간이 예상보다 짧아 공 산당 간부들은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의 당적(黨籍)복권은 보류됐다.
이 시기에 그는 자오허핑(趙阿平)이라는 중국처녀와 결혼했다.
36년 김산은 김성숙.박건웅등과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창설해 중앙위원으로 선출됐다.그해 옌안으로 가 활동하던 그는 여기서 웨일스를 우연히 만나 자신의 고뇌에 찬 생애를 기록으로 남길 수있었지만 38년 33세의 젊은 나이로「반혁명 간 첩혐의」를 받고 억울한 최후를 맞았다.
83년 중국공산당은『김산에게 덮어씌운 누명을 벗기고 명예와 당적을 회복시킨다』고 선포했다.45년만에 「일본의 간첩」이라는누명을 벗고 복권된 것이다.
그와 웨일스가 만나 남긴『아리랑』은 개인의 활동기록 차원을 넘어 광저우봉기를 비롯해 당시 수많은 조선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담고 있어 역사자료로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鄭昌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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