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50주년특집>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말하는 광복5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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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동학군은 독립투사를 낳고,독립투사는 수위를 낳고,수위는 도배장이를 낳고… 매국노는 친일파를 낳고,친일파는 탐관오리를 낳고,탐관오리는 악덕기업인을 낳고….」 순국선열유족회장 이종갑(李鍾甲.71)씨는 소설가 박완서(朴婉緖)씨의 장편소설 『오만과몽상』(82년)속의 이 구절을 떠오르게 하는 독립운동가 후손이다. 『우리 가족은 만주에서 경작이 잘 되는 논을 찾아 열댓번은 이사다녔어요.생활이 어렵기 때문이었지요.총독부가 운영하는 농장에는 아예 갈 수도 없었어요.』 李씨의 조부는 을미사변(1895년)직후와 군대해산(1907년)후 연합의병의 관동창의대장등을 맡아 항일의병활동을 벌이다 1909년 충북 황간에서 일본헌병에 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이인영(李麟榮.1860~1909년.건국훈장 대통 령장 추서)선생.
李씨는 할아버지가 처형된후 만주 흑룡강성으로 피신한 부모의 2남1녀중 차남(형님은 70년대초 사망)으로 태어나 어렵고 힘겨운 소년시절을 보냈다.
『해방후 고향에 와보니 선산을 빼놓고는 땅 한뙈기 없더군요.
그후 서울 묵정동 피난민촌으로 가 살면서 행상등 궂은 일치고 안해본 것이 없습니다.대학도 들어갔다 그만두었어요.』 李씨는 국가보훈처 도움으로 61년 한전 관리직으로 들어가 20년간 근무한뒤 80년 정년퇴직하고 81년부터 순국선열유족회 상임부회장을 맡아오다 90년 회장이 됐다.
李씨는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려면 순국선열의 정신을가르쳐줘야 한다』며 『따라서 중국 상해임시정부가 유.무명의 30만 순국선열 혼령을 위무하기 위해 1919년 제정한 순국선열기념일을 법정기념일로 지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李씨는 『여생을 이 일에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李榮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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