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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외교 관계자 “청와대 발표 실제상황과 거리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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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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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 14일(현지시간) 오후 워싱턴 매리엇 호텔에 마련된 프레스센터에 송민순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들어섰다. 이날 오전 그는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백악관 한·미 정상회담에 배석했다.

“한·미 양국 고위 실무선에서 6자회담 재개와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해 양국이 지금 협의하고 있는 공동의 포괄적 접근방안(common and broad approach)을 다른 참가국들과 추가적으로 협의해서 만들도록 했다.”

그의 발표에 취재진의 질문이 쏟아졌다. 당시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7월 5일 북한의 미사일 발사 이후 대북 강경 제재로 움직이고 있었다. 7월 비공개로 서울에 들어온 스튜어트 레비 미 재무부 차관은 당시 유명환 외교부 제1차관에게 “대북 송금과 대북 화물 수송을 금지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통보했다. 유엔 안보리도 대북 제재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날 청와대 발표는 미국이 대북 제재에서 대화로 국면을 전환했다고 생각하게 했다. 삐걱대던 한·미 양국이 견해 차를 좁혔다는 기대를 품게 하기에 충분했다. 무엇이 미국을 움직였는지 기자들은 궁금했다. 하지만 송 실장은 그 내용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지금 관련국들이 (각자가 해야 할 조치를) 정교하게 조합해야 하는 과정이니 궁금하더라도 참아 달라”고만 했다. 최근 본지 기자를 만나서도 그는 “상대방(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현직에 있는 만큼 공개할 수 없다”며 입을 다물었다.

청와대는 내용을 감춘 ‘공동의 포괄적 접근방안’이란 포장을 정상회담의 핵심 성과로 부각했다. 바로 그날 국정브리핑 홈페이지에 ‘북핵, 공동의 포괄적 접근방안 마련 합의’ ‘한·미, 공동의 포괄적 접근방안 합의 막전막후’ ‘미래지향적 한·미 관계 디딤돌 놓았다’는 제목으로 홍보 기사를 잇따라 올렸다.

◇‘한국의 역할’ 내세운 정부=당시 대북 협상을 담당했던 한 고위 외교관은 “그 내용은 별로 새로울 게 없었다. 핵심은 대북 제재를 미루고 6자회담을 계속하자는 것이었다. 그래도 안 되면 한국도 제재에 동참하겠다고 약속했다”고 말했다. 이 방안을 추진했던 청와대 관계자도 “요체는 미국은 방코텔타아시아(BDA) 금융 제재를 풀고, 북한은 즉각 핵 신고·핵 시설 불능화의 행동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며 “비공식적이지만 북한이 이를 거부하면 한국이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참가를 검토하겠다는 말도 오갔다”고 말했다. 제재 국면으로 들어간 미국과 국제사회를 어떻게든 대화 국면으로 끌어내는 것이 이 방안의 목적이었다는 말이다. 그 수단으로 한국의 제재 동참을 내건 것이다. 결국 그 약속은 끝내 이행되지 않았지만….

이를 추진했던 인사들에 따르면 그해 7월 4∼6일 송 실장이 미국에서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스티븐 해들리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접촉하며 이 방안이 본격화됐다. 당시 해들리 보좌관은 송 실장에게 “(주고받고 그래도 안 되면 제재한다는데) 한국이 제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믿느냐”며 거절했다고 한다.

8월 말 청와대 박선원 비서관, 임성남 행정관 등이 다시 워싱턴을 찾았고, 9월 초 송 실장이 이들과 합류했다. 이때 처음엔 미적지근하던 라이스 국무장관이 “한번 검토해 보자”고 했고, 송 실장이 “양측 대리인들이 있으니 만들어 보자”고 하면서 협의가 시작됐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직후 워싱턴에서 미 국무부의 젤리코 자문관과 임 행정관 등이 협의에 들어가 9월 한·미 정상회담 때 반기문 외교부 장관·송 실장-라이스 국무장관·해들리 보좌관의 ‘2+2회담’을 열어 대통령에게 이 방안을 보고하는 계획이 마련됐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 참여한 한 외교관은 “정상회담 전날인 9월 13일(현지시간) 라이스 국무장관 측에서 ‘2+2 회담’을 다음날 열자고 연락이 왔다”고 말했다. 한국이 미국을 설득해 대화 국면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뜻이다. 송 실장은 최근 본지 기자와 만나 “(7월 방미) 당시는 항공모함에 훅을 걸은 정도였고, 당겼는데 당겨오지는 않았다. 거대한 항공모함을 돛단배로 움직이는 기분이었다”고 표현했다.

◇한·미 간 계속된 동해 같은 이견=그러나 정상회담 이후 드러난 미국의 공식 행보는 공동의 포괄적 접근방안 마련을 합의했다는 한국 정부의 발표와는 거리가 멀다. 정상회담 당일 뉴욕 타임스가 부시 대통령의 참모들을 인용, “두 나라 간에는 동해와도 같은 갭이 있다”고 했던 양국의 이견이 회담 후 좁혀졌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회담 이틀 후인 9월 16일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은 싱가포르의 G8 재무장관 회담에서 공개적으로 대북 제제에 대한 국제적 연대를 촉구했다. 사흘 후인 19일 워싱턴에선 미 국무부 관리가 이례적으로 한국 특파원들을 불러 “미국은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를 이행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강구 중이며(1994년) 제네바 합의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방안도 있다”고 공개했다. 대북 제재를 더 강화하겠다는 뜻이다.

9월 20∼28일 천영우 외교부 평화교섭본부장과 힐 차관보가 양국 실무진을 이끌고 워싱턴과 뉴욕을 오가며 진행한 공동의 포괄적 접근방안에 대한 후속 협의도 순조롭지 않았다는 얘기가 나온다. 당시 청와대에서 대북 문제를 담당했던 한 당국자는 “북한을 달랠 해결책은 모두 미국이 취해야 할 조치였던 게 문제였다. 따라서 몇 차례 실무회담을 했으나 성과가 없었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의 핵심 외교·안보 인사도 “28일 귀국한 천 본부장을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서울에서 만났지만, 한·미 협의가 잘 안 돼 우 부부장이 북한에 줄 게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한·미 실무협상에 참여했던 미국 측 담당자는 최근 본지 기자를 만나 “북한이 아무런 의무도 이행하지 않는데도 한국은 무조건 모든 인센티브를 올려 놓고 북한을 설득하자고 요구했다. 미국으로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얘기였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한·미 간에 합의한 것처럼 발표한 데 대해 그는 “송 전 실장은 자신의 임기 중 치적을 원했다. 늘 한국이 미국의 대북 유연성을 끌어낸 것처럼 보이기를 원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노무현 정부의 한 외교·통일 당국자도 “그때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미국이 대북 제재에 전력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자 송 실장이 미국이 한때 고려했던 포괄협상 개념을 끄집어내 BDA 문제까지 얹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에서 한때 검토한 내용이긴 하지만 정상회담의 실제 내용과는 전혀 다르다는 설명이다.

이에 대해 송 전 실장은 최근 “북핵 문제는 한반도의 핵심 현안인 만큼 주인 의식을 갖고 절벽에서 뛰겠다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며 “북핵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드러내면 안 되지만 북·미가 할 수 없는 것을 한국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위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현실과 멀었던 레토릭”=결국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했던 10월 9일까지 ‘공동의 포괄적 접근방안’은 나오지 않았다. 이 방안을 추진했던 인사들은 발표 당시 완성된 로드맵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내용’은 없어도 ‘골자’는 있었다는 것이다. 정상회담 후 한·미 실무협의에 참여했던 한 외교관은 “핵실험 당일 미국 측에서 ‘백악관이 오케이 할 것 같다’는 연락이 올 정도로 성사 직전 단계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가 상대했던 미국 측 협상 당사자는 이마저 부인하고 있다. 최근 본지 기자와 만난 미국 측 인사는 “한국의 주장은 늘 똑같았다. 미국이 북한에 더 유연해지고, 압박을 하지 말며, 더 많이 대화하라는 것뿐이었다. 솔직히 우리는 한국의 계속된 그 같은 주장에 화가 났을 정도다”라고 말했다. 당시 북핵 외교 관계자도 “청와대의 현란한 레토릭은 실제 돌아가는 상황과는 거리가 있었다”고 말했다. 협상 상대는 인정하지 않는 자신만의 ‘밑그림’으로 그 이후 상황을 계속 오도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다.

특별취재팀=강찬호 워싱턴 특파원,정치부문 김수정·예영준·채병건 기자, 국제부문 정용환·이수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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