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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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제2부 불타는 땅 운명의 발소리(15)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길이 없기 때문이다.어쩌겠는가.지금 여기는 전쟁이 한창인 일본 땅이다.노예라고도 하지만,내 하루하루는 노예도 못되는… 벌레가 사는 것과 다를게 없지 않은가.그런 나에게 있어 미치코는무엇 인가.
『건강해 뵈니 좋아요.』 미치코가 말했다.
『만나러 오길 잘했다 싶어요.』 『난 여기서….』 『알아요.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미치코가 앞서면서 그를 돌아다보았다.
『요시오라는 그 분이 다 말해 줬어요.이렇게 찾아와서 만나는것도 안되는 일이라는 것도 다 알아요.』 다리를 건너서 두 사람은 좁은 길을 걸었다.이제부터 길은 마을로 향하고 있었다.그곳에는 불빛이 있을 것이고,사람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집들이들어서 있으리라.
빨래를 하기도 했고 물을 길어다 먹기도 했던 그 골짜기를 내려다보면서 둘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떻게 지냈어.미치코는?』 『공습 때문에,거기서도 아이들을전부 시골로 보내고 있어요.아시잖아요,친척이 나가사키에 있다고했던 거.그래서 저는 이쪽으로 왔던 거예요.』 『위험하기는 여기도 다를게 없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지상은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 친정이 이쪽 규슈라고 들었던 것을 지상은 떠올렸다.내가여기 있기에 이곳으로 찾아왔으면서도 이 여자는 차마 그렇게는 말하지 않을 뿐이다.
『생각나? 그때 내가 조선의 강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던 말.
』 『그럼요.난 아무것도 잊은게 없어요.』 두 손을 깍지껴 움켜잡으면서 지상이 말했다.
『길이 없어.여기서는.』 어둠 속으로 미치코는 지상의 얼굴을마주보았다.그 눈이 말하고 있었다.언제나 그랬잖아요.우리에게 언제는 길이 있었던가요.
『저 밑의 마을에서는 아이들이 우리를 보면 돌을 던지지.조센진은 없어지라면서.도망을 칠 수도 없어.몇겹으로 감시를 하고 있으니까.내가 아냐.여기서는 미치코와 내가 있을 곳이 없어.이렇게 만나는 것도 아마 이것이 마지막일지 몰라.』 미치코가 손을 뻗어 지상의 손을 더듬어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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