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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상속세, 완화나 폐지가 옳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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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국민 정서를 이용한 비합리적인 정치논리가 팽배하면 잘못된 제도가 만연된다. 그 예로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강화된 상속과세를 들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경제개발 연대를 지나오면서 축적된 거대한 부의 정당성과 투명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그 축적 수단이 부동산 투기나 정경유착의 산물이라고 보는 사회적 시각이 확산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민 정서를 등에 업고 출발한 DJ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세계적 추세에 역행하면서 상속증여세율을 인상하고 완전포괄주의를 도입했다. 명분은 재벌의 편법 증여와 상속을 막고 부의 세습적 집중을 억제함으로써 경제적 기회균등을 강화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속과세는 시장경제 체제를 경제의 기본질서로 삼고 있는 국가들을 중심으로 속속 폐지되고 있다. 상속과세 강화를 통해 경제적 기회균등을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또한 불합리하고 과도한 부담을 지우는 상속과세가 장기간 지속될 경우 자본자유화에 편승해 국부가 국외로 유출되고, 심지어 부를 소유한 계층이 국적을 상속과세가 없거나 낮은 다른 나라로 옮길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고려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정부에서도 상속세 완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늦은 감이 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상속세율을 외환위기 이전 수준으로 내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상속세를 폐지하고 자본이득세로 전환할 수 있는 단계적 개편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아직 자본이득과세를 실행할 만한 충분한 조세 인프라를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시에 상속과세제도를 폐지하는 것은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없다. 따라서 경제 거래의 투명성을 제고할 수 있는 조세 인프라를 구축하는 한편, 상속세를 단계적으로 완화하고 5~10년 내에 상속세를 완전히 자본이득세로 전환할 수 있는 로드맵을 제시해야 한다.

상속세는 단계적으로 폐지해 나가되 불합리한 상속증여과세제도를 조속히 개선해야 한다. 우선 유산과세형에서 취득과세형으로 전환해야 한다. 유산과세형은 승계받는 유산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같은 세율이 적용되기 때문에 부담 능력에 따라 차별 과세해야 한다는 ‘응능원칙(應能原則)’에 위배된다. 반면 취득과세형은 부의 소유자가 부를 여러 사람에게 분산하면 할수록 상속과세의 부담이 적어지기 때문에 상속과세의 기본취지인 부의 분산을 유도하는 데 더욱 적합한 제도라 할 수 있다.

완전포괄주의도 열거주의로 전환해야 한다. 완전포괄주의 제도하에서는 과세기관의 폭넓은 재량적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에 경제주체가 세금을 미리 예측하기 어렵다. 조세법이 모호하고 그 해석이 자의적이어서 이를 예측할 수 없는 경우 경제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증여 의제규정들을 폐지해야 한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완전포괄주의로 전환하면서 제정된 ‘증여과세 후 개발이익 등에 대한 증여과세’ ‘비상장 주식 상장 시의 시세차익에 대한 증여과세’와 같은 조문들이다. 토지나 비상장 주식을 물려받은 후 5년이라는 기간 내에 그 가치가 상승했다면 이를 연속된 하나의 증여로 취급해 증여세를 한 번 더 부과하는 제도다. 포괄증여과세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는 제도들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자본이득세를 과세할 세원에 우리는 증여세를 재차 부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들은 개발을 통한 토지의 가치, 투자를 통한 기업의 가치를 높이려는 노력을 저해할 뿐이다.

그동안 부의 축적과정에 정당성과 투명성이 부족했다는 부정적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해 상속증여세를 통해 부의 집중과 세습을 막아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만들자는 감성이 지배하는 시대를 살아온 듯하다. 글로벌 경제시대에 맞는 세제를 갖춤으로써 우리가 세계무대에서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는 것이 실용주의를 실현하는 출발점이다.

조경엽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