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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시시각각

이재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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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선거 다음 날 이재오 한나라당 의원은 아들과 함께 텅 빈 유세차를 타고 서울 은평구를 돌았다. 그 잔인하다는 낙선인사였다. 시장 노점상들이 손을 흔들어 위로했다. 그는 “그때 그렇게도 참고 참았던 눈물이 그냥 쏟아졌다”고 말했다. 그는 울 만하다. 마음껏 더 울어야 한다.

재야운동가 이재오는 1996년 총선 때 신한국당(지금의 한나라당)에 들어왔다. 그는 트로이의 목마였다. 서민 이재오는 목마에서 내려 부자 정당의 급소를 공격했다. 그는 가진 것이 없어 잃을 게 없는 사람이었다. 이명박·노무현·이인제·홍준표…. 찢어지게 가난했던 정치인은 많다. 그러나 이재오처럼 출세(3선)한 이후에도 여전히 가난한 이는 없다. 이회창 전 총재는 그에게 “가난이 당신의 힘”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재오는 광부·소작농의 아들이다. 장학금을 받으러 중앙대에 갔다. 결혼해서 그는 은평으로 들어갔다. 대조동·역촌동·불광동 단칸방에서 세를 살았다. 45세가 돼서야 그는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2850만원짜리였는데 2000만원을 대출받았다. 나는 그의 살림을 본 적이 있다. 목욕탕엔 욕조가 없다. 이 의원은 2005년 둘째 딸이 결혼할 때까지 자기 방이 없었다. 그는 71년 박정희 정권의 수배 중에 결혼했다. 경주로 신혼여행을 갔는데 첫날밤을 보낼 여관을 잡느라 애를 먹었다고 했다. 이 의원은 저녁 늦게 집에 돌아갈 때 지하철을 타곤 했다. 새벽 5시면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지역구를 돌았다. 이런 서민형 지역관리로 그는 경상도(영양) 출신으로 호남 인구가 많은 곳에서 내리 3선을 했다.

그런 이재오는 왜 추락했을까. 성공이 거꾸로 실패를 불렀다. 서울 3선이 되고, 원내대표·최고위원이 되고, ‘형님’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든 그 경이로운 속도에 자신을 쉽게 맡겨 버렸다. 그는 이명박 시장을 보면서 시장의 꿈을 품었고, 이명박 대통령을 보면서 대통령의 꿈을 키웠다. 그는 너무 서둘러 질주했다. 총선만 지나면 7월엔 대표가 되고, 그렇게 4년이 지나면 대선후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야망을 너무 쉽게 드러냈고 사람들을 너무 서둘러 모았다. 물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면 대운하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대운하를 훈장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문국현 때문에 멍에가 되고 말았다.

그는 권력엔 서둘렀고 포용엔 서툴렀다. 그는 한나라당에 들어가고도 산업화·근대화라는 당의 정신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4년 전 죽을 뻔했던 당은 박근혜 덕분에 살아났다. 그런데도 그는 선거가 끝나자 박 대표를 독재자의 딸이라고 몰아붙였다. 어느 날 나는 이 의원의 지역구 선술집에서 그와 소주잔을 기울인 적이 있다. 화제가 박정희로 흘렀다. 그는 자신이 겪은 통닭구이 고문과 유신독재 때 죽어간 사람들을 얘기했다. 나는 한·일 국교정상화로 들어온 달러와 경부고속도로·포항제철을 얘기했다. 나는 “박정희가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독재를 한 건 아니질 않는가”라고 했다. “남미 독재에 비하면 희생자도 적다”고도 했다. 이 의원의 눈이 무섭게 긴장했다. 그는 “그게 말이 되느냐”며 화를 냈다. 그러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많은 정치인을 겪었지만 논쟁 중에 먼저 자리를 뜬 건 그가 처음이었다. 그는 가난에 솔직한 것처럼 분노에도 솔직했다. 그는 군사정권에서 겪은 5번의 투옥과 7년의 감옥생활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재오는 끝내 박근혜를 넘지 못했다. 아니 역사를 넘지 못했다. 이명박 대통령과 그는 64년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투쟁(6·3운동)에 뛰어들어 박정희에게 돌을 던졌다. 그 후 이 대통령은 한국의 현대사를 포용했다. 그래서 현대가 크고, 나라가 크고,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부(富)가 컸다. 그러나 이재오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 갇혀 있었다. 낙향인가 재기인가, 그는 고민한다고 썼다. 기억 속의 이재오를 버리고 새로운 한국 사회의 이재오를 그려낼 때, 그는 재기할 수 있을 것이다.

김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