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기쁨<57> 토스카나 와인의 성지 볼게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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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호 35면

토스카나 주(州)라고 하면 보통 르레상스의 중심이었던 피렌체와 사탑으로 유명한 피사처럼 아름다운 고도(古都)를 떠올린다. 하지만 필자처럼 와인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토스카나 주 해안에 위치한 와인 산지 ‘볼게리’ 지구가 특별한 장소이자 성지다.

볼게리 마을의 대표적인 적포도주인 사시카이아를 담아둔 오크통

양 옆으로 삼나무가 쭉 늘어서 있는 길을 한동안 달리다가 오른쪽으로 꺾으면 유명한 ‘와인 거리’가 시작된다. 이곳에는 오르넬라이아, 그라타마코, 레 마키올레 같은 근사한 와인들을 만들어내는 와이너리가 밀집해 있다. 왜 볼게리의 와인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놔주지 않는 것일까. 필자가 생각하기에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첫째, 볼게리에서는 전통적인 스타일이 중시됐다. 이탈리아 자생품종으로 와인을 만들어 큰 통에서 천천히 숙성시키는 방법을 써왔다. 그런데 1970년대에는 보르도 와인의 주요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를 사용해 프랑스식으로 작은 통에 담아 일찍부터 마실 수 있는 와인을 만들어냈다. 이 일은 당시 큰 선풍을 일으켰다.
둘째, 토스카나에서 오래전부터 명품 와인 생산지로 군림해 온 키안티 지구와 몬탈치노 마을, 몬테풀치아노 마을과 비교해 1970년대의 볼게리는 토지 가격이 저렴해 새롭게 와인 제조에 도전하려는 야심가가 많이 진출했다. 그들은 각각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와인 제조 수준을 향상시켰다.

셋째, 생산자들이 기존의 와인 제조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발상으로 독창적인 와인을 만드는 점을 가장 큰 이유로 꼽을 수 있다. 실제로 그들이 만드는 와인은 대부분 테이블 와인인 ‘비노 다 타볼라’, ‘I.G.T’다. 숙성기간에 구애되지 않으므로 일찍 시장에 내놓을 수 있고, 투자한 자본을 바로 회수할 수 있다. 캐시플로(cash flow) 면에서도 합리적이며 이로 인해 신진 기예 와인 메이커가 많이 유입됐다.

몇 년 전 3월 초순에 볼게리를 찾았다. 원래 볼게리는 서민들의 해수욕장으로 번성했던 곳이다. 해안선에는 별장과 작은 리조트 호텔이 줄지어 서 있다. 적포도주 산지로 주목받기 전에는 트레비아노 품종으로 만든 가벼운 백포도주 산지였다. 레스토랑에 가보면 생새우, 가리비, 성게 파스타, 삶은 바닷가재 같은 해산물 요리가 인기 있다. 와이너리에서 백포도주를 만들고 싶어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비수기라 문을 연 레스토랑이 몇 안 됐다.

호텔 직원이 추천해 준 레스토랑에 가봤다. 역시 해산물 요리가 눈에 띄었다. 볼게리의 백포도주를 추천해 달라는 말에 점원은 레 마키올레사(社)의 ‘팔레오 비앙코’를 가져다 줬다. 여기에 맞춰 해산물 찜을 주문했다. 역시 그 지방의 와인과 음식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해산물과 백포도주를 맛있게 먹고 나니 어김없이 적포도주 생각이 났다. 낮에 들른 와이너리의 ‘사시카이아’를 주문했다. 점원이 “비수기라 추천할 만한 고기 요리는 없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러면 숙성된 치즈를 주세요. 그리고 당신들과 나누는 즐거운 대화가 있으면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다른 손님은 없었다. 음식을 내온 뒤 그들도 의자를 가져와 함께 마셨다. 즐거운 대화를 안주 삼아 볼게리 사람들과 볼게리의 와인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셨다. 음식이 없어도 대화가 와인과 멋진 마리아주를 이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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