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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문(門)’을 찾아서’ ⑦ 숙정문

중앙일보

입력

“이 문을 닫지 않으면 여인들 마음에 바람듭니다”

조선시대 사람들도 이혼을 하고 살았다?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다. 구체적인 통계자료가 없을 뿐 조선시대에도 이혼사례는 빈번했다. 그 증거는 당시의 거리 풍경에 있다. 양반들의 이혼 절차는 몹시 까다롭고 복잡해서 이혼 신청을 했다가도 포기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으나, 평민들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천민들의 이혼방법은 아주 간편했는데 배우자가 서로의 옷고름을 칼로 잘라주는 것이 전부였다. 이들은 잘린 옷고름을 일부러 내보이며 몇 날 며칠이고 거리를 활보했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이 옷고름이 잘린 채 돌아다니는 이혼녀를 눈여겨보았다가 한밤중에 보쌈을 감행했다. 모든 것이 짜고 치는 타짜들의 한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양반은 예외였다. 과부와 홀아비를 되는대로 짝지어 주는 것이 천민사회의 미덕이었다면, 한번 결혼했던 여인은 평생 수절하며 조신하게 지내야 하는 것이 양반가 여인들의 법도였다. 날이 맑으면 이른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장독대 뚜껑을 열어 장맛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고 날이 흐리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서책을 붙들고 있어야 했던 비운의 여인들. 출타라도 할라 치면 삿갓을 쓰고 갓 아래로 커튼처럼 너울을 둘렀다. 어쩌다 멋을 내도 남들이 볼까봐 가마 앞에 큰 발을 드리우고 먼 길을 오갔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항상 감시하는 존재가 있었으니 엄격한 보수시대의 법과 풍속이 그러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음양가들은 나라의 풍기문란을 단속하는 중책을 맡았는데 이때 주요 공격 대상이 된 것이 바로 북쪽의 대문 숙청문이다.
그들은 숙청문의 개방이 곧 나라의 화를 자초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뭣보다도 아녀자들의 음기가 성행할 것이라 단언했다. 그래서 북쪽의 대문은 그대로 닫혀버리고 그 근처에 홍지문(弘智門)이라는 출입구가 생겨났다. 닫혀버린 숙청문은 태조 5년(1396) 도성 축조 때 만든 것으로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산의 동쪽 마루턱에 위치했다. 음기를 부추긴다는 이유로 문의 기능을 잃어버린 채 긴 세월을 침묵해야 했던 운명이 창의문과 비슷하다.
하지만 북대문이 늘 닫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나라에 가뭄이 들면 왕이 몸소 기우제를 지냈는데 그때가 바로 북대문이 제 구실을 하는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다. 북문 혹은 숙청문으로 불렸던 이 문이 중종18년에 숙정문(肅靖門)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얻어 이후부터는 두 가지 이름이 모두 사용된다.
다른 이름이 생겨난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신성한 기우제를 지내는 구역이니만큼 고요한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근처의 시장을 대대적으로 옮기는 등의 과정에서 자연스레 생겨난 것으로 추측된다. 이어서 연산군 10년(1504)에는 숙청문을 아예 헐어내고 그 옆에 새 문을 다시 만들라는 명이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너무 많은 공사 명령을 내려댄 통에 건축을 실제로 이행하기는 어려웠다.
예종에 들어서부터는 기우제의 스타일이 조금 바뀌어 북쪽에서 끌어오는 음기가 남쪽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숭례문을 굳게 걸어 닫았다. 성대한 기우제는 무당과 박수가 진행했는데 서울에서 지낼 때는 행사 인원을 몇 백 명까지도 동원했다. 기우제를 지내도 큰 효과를 보지 못하면 나라에서 직접 지방이나 신당에 무당을 보내 제사를 지냈는데 일반 백성들은 산마루나 고개에 돌을 쌓는 식으로 정성을 보탰다. 이런 노력은 고려 때부터 국가에서 관장했는데 조선 때는 전국의 주요한 산에 신사를 세우는 등 그 규모를 확대시켜 바람과 구름, 천둥, 비의 신을 모셨다.
송악산과 지리산 완산 무등산 계룡산 백악산 목멱산(남산)에 설치한 20여 곳의 신사는 국가에서 인정한 가장 신성한 곳으로 이 가운데 남산의 목멱 신사가 전국 무당의 중심지였다. 신상은 다양했는데 그 중에서도 군왕신이 가장 흔했다. 군왕신이란 군왕을 위해 벼슬살이를 하다가 죽은 사람을 받드는 신으로 이를 모시는 무당은 장군복장을 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외경심을 자아내게 했다. 이러한 문화가 민중에게 퍼지면서 집안의 소소한 수호신들이 생겨나는데 집터의 토신, 부엌의 조왕신, 측간의 측신, 우물가의 정신 등이 있었다. 소박한 행복을 지켜주는 수호신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서울 사람들은 흰 종이에 동전을 싸 접어서 맑은 물을 담은 그릇과 함께 대들보 위에 올려놓았고 부엌의 조왕신을 위해 날마다 밥을 해 올리며 등불을 밝혔다. 계속해서 문설주와 측간에 부적을 붙이는 등 백성들의 미신문화가 난무하자 급기야 세종은 귀신 모시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내린다. 그리하여 기세를 떨치던 무속인들이 도성 밖으로 쫓겨나는데 그래도 이들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여전했다.
무당들은 사대문 밖에서 눈치껏 굿판을 벌이면서 인왕산 자락에 터를 일구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성종과 중종은 무속인 처벌 규정까지 만들어 도성 출입을 철저히 차단했으며 무당집을 모두 헐어버리고 지방에 퍼져있는 신당마저 모조리 불태웠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기까지도 무속 신앙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 곁에 남아있다. 첨단과학을 달린다는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무속신앙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종교이기 이전에 든든한 멘토이자 문턱 낮은 병원이었다. 그러므로 뿌리가 뽑히기는커녕 사람들은 기우제와 같은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북대문을 향하는 무당의 꽁무니를 따라다녔다. 서민들은 개인적인 굿을 할 때도 북쪽의 영험함을 탐하곤 했는데 문까지 접근이 어려울 때는 근방의 산속에서 푸닥거리를 했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던 숙정문은 그 규모와 형식이 같은 시기에 건립된 창의문과 비슷하다. 하지만 원래의 문은 임진왜란 때 훼손되었다. 현재 보존되고 있는 문은 1976년 복원해 놓은 것이라 문화재로서 가치가 떨어진다. 건물 구조는 육축의 상부 천장을 특이하게 석재 홍예로 구성했는데 외벽 쪽의 일부 구간은 홍예를 1단 더 높여 아치를 만들어 문비를 다는데 편하게 했다. 기타 사항은 다른 문들과 비슷하고 전체적으로 조선 성곽의 기본 구조를 따랐다. 여인들이 바람이라도 필세라 조바심 내며 굳게 닫혀왔던 숙정문. 그래도 그 옛날엔 가뭄이 들 때마다 비를 부르는 힘으로 큰 권력을 누렸건만 기상청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그런 낙도 없이 그저 군부대 바깥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다.

워크홀릭(WALKHOLIC)이 함께 한 김윤만의 서울 성곽답사 ⑦ 숙정문~ 혜화문

○ 숙정문 안쪽 성곽을 따라 급경사를 내려오면 말바위쉼터-와룡공원에 도착하게 된다.


○ 이곳 성북·명륜지구 성곽은 구불구불 잘 복원되어 있다.


○ 성북·명륜지구 성곽에는 암문이 하나 있는데 혜화역 출발 ⑨번 마을버스 종점에서 와룡공원으로 오르면 성곽과 마주치는 곳이다.


○ 성곽을 따라 내려오면 우측으로 서울과학고가 눈에 들어오고 서울과학고 뒤(성북동 쉼터)에서 도로로 성곽이 끊긴다.


○ 이곳에는 서울과학고와 경신중·고등학교가 도로 하나사이로 인접해 있고, 서울과학고 앞에는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이 있는데 옛 날 송시열선생 집터이기도 하였으며, 북관묘 터이기도 하다.


○ 경신고등학교 뒤로 돌아 내려가면 혜화동 혜성교회가 나오는데 교회 정문 축대 밑에는 지금도 성곽의 흔적이 남아있다.


○ 혜성교회에서 빌라지역으로 내려오면 높다란 축대위에 두산빌라가 있고 이곳에서 진아 단식원까지의 축대는 성곽과 함께 이루어져 있다.


○ 혜화동과 동소문동을 연결하는 도로로 성곽이 끊기며, 진아 단식원을 조금 지나면 나뭇가지 사이로 혜화문이 보인다.

객원기자 설은영 skrn77@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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