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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한국소설 최초의 칙릿 ‘스타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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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이 나왔다. 신예작가 백영옥(34)의 첫 장편 『스타일』(예담)이다. 일단 세계문학상은, 올해도 이목을 끄는 데 성공한 듯 보인다. 패션잡지 기자 출신의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어서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쯤에서 짚이는 게 있을 게다. 맞다. 『스타일』은 칙릿(Chick lit)이다. 단언컨대 소설은, 한국소설이 낳은 최초의 본격 칙릿 장르다.

아직도 칙릿? 하실 분을 위해 설명을 붙인다. 말하자면 칙릭은 ‘젊은 여성(Chick)’의 ‘소설(lit·literature)’이다. 여성에 의한, 여성에 관한, 여성을 위한 소설이다. 애초엔 페미니즘 쪽에서 주목한 문화현상이었고, 요즘엔 일종의 장르문학으로 분류된다. 장르문학이란 건, 몇 가지 문법이 작동한다는 걸 가리킨다. 현재 통용되는 칙릿의 장르 문법은 다음과 같다.

①주인공 : 직장생활을 하는 20~30대 독신여성. 주로 전문직 종사자. 업종별로 출판·광고·홍보·패션 분야.

②주인공 캐릭터 : hip & stylish(유행에 민감하고 세련됐음). 또는 그런 세상을 훤히 알고 있음. 그러나 되바라진 건 아님. 정치적으로 올바르고(politically correct) 일말의 순정도 꼭 간직하고 있음. 패션 브랜드를 형용사처럼 구사함. (예) 이번 시즌 구찌의 하이힐 굽만큼 뾰족한 저 입술.

③무대 : 대도시. 뉴욕에서도 맨해튼. 서울은? 물론 청담동. 업소로 특정할 수도 있음. 블루 치즈와 고르곤졸라를 넣은 샐러드와 라자냐, 훈제 연어와 크림으로 졸인 해물 리조또 그리고 시원한 레몬 셔벗까지 만족스러운, 웨이팅 리스트가 꽉 찬 원 테이블 이태리 레스토랑.

④주요 출연진 : 못된 직장상사(암암리에 악마·마녀 따위로 비유되는). 서로의 비밀까지 공유한, 하여 남성 취향까지 얼추 비슷해진 십 년 이상 묵은 여자친구. 일로 만난 멋진 남자(외모·능력·매너를 완비한 데다 신비스런 구석도 있는 Mr. Right).

⑤갈등구조 : 직장에서 살아남기(또는 성공하기). Mr. Right와의 티격태격 연애담. 그리고 허벅지살 또는 아랫배와의 결전.

⑥시점 : 1인칭. 늦은 밤, 친구와 전화로 수다 떠는 풍으로.

⑦결말 : 예외없는 해피 엔드. 직장에서 마녀를 축출하고(뒤이은 인사에서 그 마녀의 자리를 꿰차고), Mr. Right와의 로맨스도 쟁취함.

이렇게 줄줄이 늘어놓는 이유야 간단하다. 『스타일』은 앞서 열거한 장르 문법 중 단 하나도 위반하지 않는다. 소설을 한국소설 최초의 본격 칙릿이라 단정한 이유다. 『스타일』 앞에서 정이현·이홍 등의 소설은, 이를 테면 향 첨가 정도에 그친다.

하나 작가는 칙릿으로 호명되는 걸 반기지 않는다. 한국문단의 시큰둥한 시선을 알고 있어서다. 하여 드문드문 위장 장치도 마련해 두었다. 성수대교 붕괴사고를 끄집어내고 88세대를 운운하는 대목이 그 역할을 담당한다.

그런데도 칙릿이라 부른다. 여태의 어느 한국소설보다 칙릿의 장점이 잘 부려져 있어서다. 한국소설이 부러 고개 돌렸던 우리네 삶의 한 방식을, 그 복판에 들어가 앉아 빤히 들여다 보고 있어서다. 예컨대 ‘굶주려 뼈만 남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무너지고, 새로 나온 마놀로 블라닉을 보면 그게 갖고 싶어서 잠이 안 온다(205쪽)’와 같은 문장은, 신선하고 또 진솔하다. 한국소설의 영역 확장을 환영한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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