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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재 값 폭등 이유로 계약 해지할 수 있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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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호 22면

원유 가격이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서고, 수입 곡물 가격이 급등하면서 한국경제가 몸살을 앓고 있다. 최근 원자재 가격이 치솟는데도 불구하고 납품가가 고정돼 어려움이 많다며 주물조합과 레미콘조합이 납품 중단을 선언한 바 있다. 자동차부품 업체도 납품가를 인상하지 않으면 부품 생산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고 하소연한다.

원자재나 부품을 납품하는 하도급업체는 계약에 의해 납품 가격이 장기간 고정되어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원자재 가격이 폭등하더라도 하도급업자는 사전에 합의한 가격에 따라 원자재나 부품을 납품해야 할 법률상 의무를 진다. 그럼 하도급업자는 언제까지 손해를 보면서 공급해야 하나. 공급계약을 해지하고 새로운 납품 가격을 주장할 수는 없을까.

계약이 유효하게 성립된 것이라면 당사자는 계약상의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해야 한다. 그런데 계약 성립 후 계약 체결의 기초를 이루는 사정이 당사자의 책임과 상관없이 현저하게 바뀌어 최초의 계약 내용을 강제하는 것이 신의칙이나 공평의 원칙에 반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이때 계약 당사자가 계약서의 내용을 신의칙이나 공평의 원칙에 맞도록 변경할 수 있다는 원칙이 ‘사정 변경의 원칙’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법원은 당사자 간 처분문서의 효력에 우선순위를 두고 사정 변경의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처분문서란 증명하려고 하는 법률상의 행위가 그 문서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법원은 처분문서의 기재 내용을 부인할 만한 분명하고도 수긍할 수 있는 반증이 없는 한 그 기재 내용대로 의사표시의 존재 및 내용을 인정해야 한다(대법원 2007.1.12. 선고 2006다61574 판결 등). 특히 당사자 일방이 주장하는 계약의 내용이 상대방에게 중대한 책임을 부과하게 되는 경우에는 문언의 내용을 더욱 엄격하게 해석해야 한다.

이 같은 입장에 따라 대법원은 부동산 가격이 매매계약 체결 당시보다 571배나 폭등한데 대해 매도인이 추가로 돈을 달라며 소송을 건 사건에서 청구를 기각한 바 있다. 국가 소유의 임야를 매수한 뒤 두 차례에 걸친 통화 개혁과 물가 급등으로 소유권 이전 등기를 마칠 때까지 부동산 가격이 무려 1620배 오른 사안에서도 “민법상 매도인이 사정 변경의 원리를 내세워 그 매매계약을 해제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고 판시했다.

이런 판례를 기준으로 할 때 원자재나 부품의 납품 가격이 공급계약에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다면 처분문서인 공급계약의 문언에 따라 납품 가격이 결정된다. 하도급업자는 예상치 못한 원자재 폭등이라는 사정 변경을 이유로 공급계약을 해지하거나 납품 가격의 인상을 주장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대법원은 계약기간이 장기인 계속적 이행계약의 경우 계약 성립 당시의 사정이 현저하게 변경되어 당초의 약정을 유지·존속하는 것이 신의칙에 반한다고 볼 만한 사정이 인정된다면 약정을 해지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취지를 방론으로 밝힌 바 있다(대법원 1990.6.12. 선고 89다카30075 판결).

공급계약의 기간이 장기간일 경우에는 원자재 가격 폭등으로 인하여 당초의 공급 가격을 고집하는 것이 신의칙에 반한다고 볼 만한 사정이 있다면 하도급업자가 공급계약을 해지할 권한이 생긴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다.

하지만 대법원은 원칙적으로 사정 변경의 원칙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원자재 가격 폭등으로 인한 하도급 공급업자의 보호는 법령의 변경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보다 빠른 방법이 될 것이다. 정부가 원자재 가격 상승에 따른 비용 증대가 납품 단가에 합리적으로 반영될 수 있도록 하도급법을 개정하도록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으므로 관련 법령의 개정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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