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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원로의 고언

3. 감정 앞세운 정치는 이제 그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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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지난 3월 12일에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한 사건은 우리나라 전체의 크나큰 불상사임에 틀림없다. 결과가 불행인 까닭에 거기에는 승자는 있을 수 없고 모두가 패자일 뿐이다. 패자들이 우선 해야 할 일은 겸허한 자세의 깊은 반성이다.

*** 국익 어떻게 될지 고민했나

이번 탄핵안의 사유로 야당 측에서 거론한 항목에 크게 세 가지가 있다고 들었다. 지난 1년 동안 대통령이 기록한 실정(失政)과 대통령 측근이 저지른 비리, 그리고 당적을 갖지 않은 대통령은 총선에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실정법을 어겼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사안에 대해 대통령 편에서도 겸허하게 반성할 여지가 있었다. '인사(人事)가 만사'라는 정치의 원칙을 따라 대통령은 개인적 정리(情理)를 초월해 전국의 인재를 두루 등용했는지에 대해 신중한 반성이 있어야 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통령 측근이 비리를 저지른 사례는 무수히 많았는데, 盧대통령은 이 사실을 역사의 교훈으로 삼았으며 어떤 비리가 생겼을 때 일벌백계의 단호함을 보였던지도 냉철하게 반성해야 했다. 그리고 대통령이 선거법을 어겼다는 야당의 주장에 다소라도 빌미를 줄 수 있는 언행이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반성의 여지가 있다.

반성의 여지는 탄핵안을 발의한 야당 측에도 있었다. 나라 살림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는 젊은 대통령이 나름대로 국익을 위한 정치의 길을 모색했을 때 야당 의원들은 대국적 견지에서 협력함에 인색함이 없었는가, 새 대통령이 시도하는 일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참을성 있게 지켜보는 대신 성급하게 혹평부터 한 적은 없는가 공정한 견지에서 반성해야 했다. 대통령 측근의 비리는 과거에도 비일비재했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盧대통령의 경우만이 탄핵의 사유가 될 정도로 심했다고 볼 수 있는가도 따져보아야 했다. 盧대통령의 언행이 선거법을 위반했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도 신중히 고려했어야 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대통령을 탄핵한다는 초유의 사실이 우리나라 국익을 위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느냐 하는 문제다.

매우 가슴 아픈 것은 盧대통령 탄핵 사건이 어느 모로 보나 명백하게 후진국형이라는 사실이다. 탄핵의 명분이 불충분했다는 것도 후진국형이며, 그것을 막기 위한 대화의 노력이 별로 없었던 것도 후진국형이다. 국회의장석 주변에서 치열한 몸싸움이 일어난 부끄러운 광경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국회 안에서 여야가 옥신각신하던 시간에 국회 밖에서는 찬성과 반대로 양분된 대규모의 군중이 시위를 감행한 것도 후진국형이다. 자랑거리가 못 되는 그 광경을 방송 3사는 이틀 동안 되풀이해 전세계에 전파를 보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니, 국민소득 2만달러 목표니 하고 떠들던 나라가 일시에 후진국으로 전세계에 알려졌으니 이 점에 얽힌 국가의 손해만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 事理 따르는 정치 기틀 만들자

盧대통령의 탄핵 통과는 의심의 여지 없는 실패작이다. 우리는 이 실패를 실패로 끝내서는 안 될 것이며, 실패를 거울삼아 많은 것을 배움으로써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번 실패의 근본적 원인은 우리 한국인의 이지(理智)보다 앞서는 감정적 기질에 있다고 생각된다. 사리(事理)를 따라 차분히 생각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직감적 느낌을 따라 행동을 결정하는 까닭에 격정에 휘말리기 쉽고 군중심리에 동조하기 쉽다. 최첨단 기술이 지배하는 정보화 시대는 두뇌의 싸움으로 승패가 갈리는 국제 경쟁의 시대다. 단시일 안에 고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새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정열과 균형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냉철한 사유의 힘을 최대한으로 살리는 새로운 국민성 함양에 힘써야 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번의 실패를 계기로 삼아 우리나라의 정치풍토를 근본적으로 쇄신하는 일이다. 지난 대선 때 거액의 돈이 오갔다는 정보가 이번 사건과 깊이 관련됐다는 사실을 거울로 삼고, 앞으로는 돈 안 드는 깨끗한 정치를 하도록 여야가 합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감정을 앞세우는 정치가 아니라 사리를 앞세우는 성숙한 정치의 기틀을 마련하도록 국민과 정치인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김태길 학술원 회원.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