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헌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헌시’-마리나 쯔베따예바(1894~1941)

내 이 글발을 헌정하노니
그 누군가 이 시로
내 관을 만들 겁니다.
사람들은 내 꼿꼿하고 증오 가득 찬
단아한 이마를 뚜렷이 볼 겁니다.

이마에 화관을 두른 채,
아무런 가치도 없이
덧없이 변해버려
내 가슴에도 낯선 모습으로
나는 관 속에 누울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할 겁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들리고,
모든 것이 보입니다!
무덤 속에서 나는
아직도 치욕을 느낍니다.
당신 같은 이들과 함께 있음을!’

눈처럼 하얀 옷을 입고--어렸을 적부터 내 얼마나 싫어하던 색이던가!--
나는 누워 있을 것입니다.--누군가와 이웃해서?--
종말의 그 순간까지.

귀기울여 들어보세요.
나는 받아들일 수 없어요!
나를 땅으로 내려놓지 말아요.
나를!

아, 그러나 모든 것은
그 언젠가 모두 스러짐을
나는 압니다!
묘지는 안식처가 결코 아니며,
살아 있는 것보다
내가 더욱 사랑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새벽까지 시를 쓰다 출출한 배를 달래려고 검은 비닐봉지에 넣어둔 고구마를 삶아 먹으려 꺼내는 순간 짐승보다 원시적인 붉은 싹과 마주친 것처럼 온몸에 전율이 인다. 오랜 망명과 귀향, 남편의 불행한 죽음(소비에트 정부를 위해 일했지만 총살당함), 문단의 외면, 파스테르나크·릴케와 서신을 통한 삼각 관계, 그리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 러시아 여성 시인에겐 원한보다 깊은 정념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싫어했던 하얀 옷을 입고 무덤에 누워 있는 환영을 그리고 있는 이 시가 그것을 말해준다. 시인은 누군가에게 헌시를 써 그 시로 관을 짜달라고 하고 있지만, 묘지는 결코 안식처가 될 수 없다. 오 미친 듯이 살고 싶다! <박형준·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