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한국현대사>36.靑山里전투보고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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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920년 10월 독립군이 일본군과 싸워 커다란 승리를 거둔청산리전투에 참전했던 한 독립군 대원이 직접 작성한 『청산리전투 보고서』가 최초로 발견됐다.김좌진(金佐鎭)과 홍범도(洪範圖)등이 이끈 독립군 연합부대가 활약한 청산리전투 에 관해 실제로 전투에 참여한 당사자가 작성한 기록이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이 보고서는 토문회(土門會)양태진(梁泰鎭)회장이 本社 현대사연구소에 제공한 것이다.
[편집자註]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일본군과 싸워 가장 빛나는 승리를 거둔 전투 가운데 하나가 청산리(靑山里)전투다.이 전투는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그리고 안무(安武)의 국민군등 약 2천여명의 독립부대가 연합해 5천여 병력에다 월등한 화력을 갖춘 일제(日帝)의 독립군 토벌대에 맞서거둔 승리기에 더욱 뜻깊다.
지금까지 청산리전투에 대해서는 그 무렵 임시정부에서 간행한『독립신문』과 일본측의 전황보고서 및 정보기록 등을 통해 당시 전투상황이 소개됐었다.직접 전투에 참여했던 독립군이 작성한 기록은 발견된 적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독립군 북만주 통신부 이중실(李仲實)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박사에게 보낸『청산리전투보고서』는 작성자가 전투에 직접 참여했던 당사자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 보고서는 1921년 9월11일에 작성됐다.보고서에 따르면일제는 1920년9월부터 간도(間島)에 있는 독립군을 토벌하기위해 중국측에 강한 압력을 넣어 중국군대로 하여금 독립군을 해체하는 임무를 담당토록 했다.또 중국 마적단을 매수해 훈춘(琿春)에 있는 일본영사관에 불을 지르게 한 후 이것을 독립군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워 토벌대 병력을 만주(滿洲)의 연길(延吉)등지에 투입시켰다.
일제는 두만강(豆滿江)상류에서 북쪽으로 40~50㎞ 지점에 위치한 화룡현(和龍縣)두도구(頭道溝)지역을 가장 중요한 공격목표로 삼았다고 한다.보고서에는 일제가 이 지역의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어떤 군사작전을 전개했는지 상세히 소개 하고 있다.
『일제는 보병 1개 대대로 유곡령(柳谷嶺).부동(釜洞).올지강(兀支崗)등 세곳을 지키게 하고 보병 1개 연대.기병과 포병2개 중대 등으로 연길현의 여러 중요한 통로를 막았다.사면 사백여리를 갈고리 모양의 공세로 우리 군사를 둘러싼 뒤 다시 보병 1개 대대와 기병 1개 중대를 청산리로 진격케 해 우리를 막았다.보병 1개 연대와 기병.포병 2개 중대는 두도구 길로 쫓아 어랑촌(漁浪村)에 진을 치고 다시 기병으로 봉미구(鳳尾溝)를 향하도록 해 우리의 뒤를 쫓으니 때는 20년10월18일 오전 6시였다.』 이에 대해 독립군은『적의 기세가 매우 드높아야전(野戰)을 피하고 삼림속으로 꾀어들이고자 청산리 북서쪽에 있는 큰 삼림안으로 군사를 모이게 해 몇개 군사로 삼림을 경계토록 하고 적의 행동을 살폈다.』 10월20일 드디어 일본군과의 싸움이 시작됐다.지금까지 청산리에서의 첫 전투는 10월21일 백운평(白雲坪)계곡에서 벌어진 것으로 알려졌다.그러나 이 보고서에 따르면 하루 전날인 10월20일 첫번째 싸움이 있었던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날의 전투상황을 보자.
『우리 군사는 어제(10월19일)청산리에 일본군 토벌대가 들어왔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오전 7시에 적이 침입해 올 좁은 모퉁이에 진지를 구축했다.진지 왼편은 삼림이 하늘을 가릴 정도였고 오른편은 우툴두툴한 절벽이 1백여m나 솟아오른 높 은 산이었다.오전 9시에 적은 보병을 앞세우고 삼림속으로 들어왔다.적의 정찰대가 우리 진지 1백m 앞까지 이르렀다.우리 군사는 사격을 힘껏 준비하고 적이 더욱 가까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적의첨병(尖兵)이 우리 진지를 알아내고 엎드리 라는 신호를 보냈으나 적의 군사는 극히 혼란해 신호에 따르지 못했다.우리 군사는이 틈을 타 사격을 시작했다.20분이 못 돼 2백명이 넘는 일본군은 한명도 남지 않고 다 죽었다.』 이 전투가 일단 끝난 후 김좌진 장군이 이끈 독립군은 퇴각하는 일본군을 더이상 추격하지 않고 이도구(二道溝)방면으로 이동작전을 전개,밤새워 갑산촌(甲山村)으로 행군했다.그 이유와 이후 벌어진 상황에 대해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 하고 있다.
『이도구로 돌아오던 적의 보병 1개 대대가 우리 진지 왼편으로 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사령관(김좌진)은 적으로 하여금 저희끼리 싸우게 하기 위해 가만히 삼림속으로 들어가 삼십리나 되는 길을 행군해 전(全)부대가 이도구에 도착했다.
우리 진 왼편을 공격하려던 적은 우리 군사가 간 곳을 모르고청산리로 들어오던 적과 깜깜한 삼림속에서 서로 마주쳐 우리 군사인 줄 알고 맹렬히 사격을 시작해 5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1921년2월25일자『독립신문』 95호는 이날 1천2백50명의 일본군이 사망한 것으로 보도했다.이 전투에 연성대장(練成隊長)으로 참전했던 이범석은『한국의 분노』라는 저서에서 일본군 3천3백명을 섬멸했다고 주장했다.그러나 이 보고서 는 청산리 백운평전투에서 일본군 사상자는 모두 약 7백명정도인 것으로기록하고 있다.박창욱(연변대.한국사)교수도『이날 실제 전투시간이 불과 한시간도 못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렇게 많은 일본군 사상자가 났을 리 만무하다』고 주장했다.
싸움은 10월21일에도 계속됐다.교전장소는 이도구 천수동(泉水洞).오전 일찍부터 시작된 이 전투상황을 보고서는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오전 8시쯤 적은 온 힘을 다해 우리를이기려고 했다.보병은 앞에서,기병은 뒤로 들어오 고,포병은 먼데서 대포를 쏘았다.
우리는 이미 좋은 진지를 차지하고 3시간이나 유감없이 싸울 준비를 했다.적의 사나운 기세를 꺾기 위해 앞에서 돌격해 들어오는 적의 보병을 닥치는대로 죽이고 옆으로 공격해 오는 적의 기병을 물리치니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을 장하고 통쾌한 큰 싸움이 됐다.적은 우리보다 네곱되는 군사로 서너번 공격을 감행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때는 오후 5시30분이었다.』 보고서에는 10월20일 청산리 백운평전투와 그 다음날인 이도구 천수동전투에서 일본군 연대장 한명과 대대장 두명을 비롯해 모두 1천2백54명이 사망하고 2백명이 부상한 것으로 돼 있다.또 이 보고서에는 사망자와 포로로 잡혀간 사람이 3명,부상자가 5명인 것으로 나와 있다.독립군측이 얻은 노획물도 속사포 4문과총 53정을 비롯해 상당량이 열거돼 있다.
***日本軍 군기 문란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청산리전투에서승리한 요인과 적이 패배한 요인을 보고서에서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적이 패한 요인으로는 독립군을 업신여기고 험한 산골과빽빽한 산림을 별도의 수색과 경계도 하지 않고 나아간 점,국지전술과 경험이 부족한 점,비겁한 군인이 많고 군기가 문란한 점등을 들었다.
독립군이 승리한 요인으로는 군인정신이 투철해 생명을 돌아보지않고 용감히 싸운 점,유리한 진지를 먼저 차지해 적에 대해 완전한 준비를 한 점,임기응변 전술 등을 통해 적의 의표를 찌른점 등을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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