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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길 떠나는 시 ⑨ 문혜진, 황규관, 안도현

중앙일보

입력

지구는 행복한 미로

시를 읽다보면 길에 대한 시들은 많지도 적지도 않다. 가령 꽃에 대한 시들보다야 적겠지만, 그렇다고 길에 대한 시가 적은 것만은 아니다. 조금 멋을 부려 말해본다면, 길은 곧 시선이다. 시인의 몸과 마음이 가닿는 곳, 그것이 시의 길인 셈이다. 시인은 모든 길을 스스로 만들며 간다. 시인은 길을 만들고 그 길을 걷는 사람인 동시에 지도 제작자이기도 하리라. 이 지구상에는 날마다 새로운 지도가 만들어진다. 이 지구는 그로 인해 행복한 미로다. 때로는 오래 헤맴과 머무름을 강요하는 시가 있는 반면 금방 출구를 드러내는 미로가 뒤섞여 있다. 지금 함께 읽을 시들 역시 그렇다. 어떤 길은 너무 짧고 어떤 길은 너무 아름답다.

장 지오노 <나무를 심은 사람>의 판화 이미지

1.

나는 여행했네
아주 먼 길을 여행했다네
행복한 집시도 만났다네 집시여
그대는 어디에서 왔는가
텐트를 운명의 길 위에 쳐 놓은 채 집시여

나의 언어는 기형 나비의 주술
새털보다 가벼운
구름의 유전자
국가나 민족을 가진 적 없는
더러운 모포를 뒤집어쓴
길 위의 부랑자
비루하고 핍박받는 생이지만
억지스런 관계는 질색이야
나선형 계단이거나
오리나무 언덕
거리의 아이들은 자판기를 부수며 놓고
늙은 짐승들은 할인 마트에서 길을 잃는다
국경을 넘어 흐르고 흘러
도무지 어쩌지 못하는
유랑의 병
손톱 밑은 시커멓고
아코디언 선율은 노쇠해도
집을 사기 위해 전 생애를 바치지 않지
나는 길 위의 순례자
롬이라 불러 줘

가난을 베개 삼아
체념을 길 위에 맡기고 잠이 들지
바퀴벌레보다 오래
지구상에 살아남아
우리는 젤렘 젤렘!

-문혜진 <젤렘 젤렘> 전문(『검은 표범 여인』 민음사)

집시는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바로 그 사람들,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것이 숙명이 바로 그런 사람들! 시인이 노래하고 있는 집시도 바로 그 집시들이다. 사실 시의 대부분은 집시의 바로 그 같은 면모를 드러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집시를 노래하고 있는 이 시는 집시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다른 말로 하자면, 집시에 대한 이 시는 집시에 대해 별다른 시적 발견을 보여주고 있지 않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궁극은 무엇일까? 길 떠나는 자유로운 영혼? 질주하고자 하는 욕망? 획일화된 사회로부터의 일탈과 저항? 어쨌든 위 시에서 시인은 시인만 홀로 길을 앞서 떠난다.

2.

사람이 만든다는 제법 엄숙한 길을
언제부턴가 깊이 불신하게 되었다
흐르는 물에 후끈거리는 발을 씻으며
엄지발톱에 낀 양말의 보풀까지 떼어내며
이 고단한 발이 길이었고
이렇게 발을 씻는 순간에 지워지는 것도
또한 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때로는 종달새 울음 같은 사랑을 위해
언젠가는 가슴에서 들끓던 대지를
험한 세상에 부려놓으려 길이,
되었다가 미처 그것을 놓지 못한 발
그러니까 씻겨내려가는 건 먼지나 땀이 아니라
세상에 여태 남겨진 나의 흔적들이다
지상에서 가장 큰 경외가
당신의 발을 씻겨주는 일이라는 건
두 발이 저지른 길을 대신 지워주는 의례여서 그렇다
사람이 만든 길을 지우지 못해
풀꽃도 짐승의 숨결도 사라져가고 있는데
산모퉁이도 으깨어져 신음하고 있는데
오늘도 오래 걸었으니 발을 씻자
흐르는 물에 길을, 씻자

-황규관 <발을 씻으며> 전문(『패배는 나의 힘』 창비)

시인은 “사람이 만든다는 제법 엄숙한 길”을 부정한다. 시인이 길을 부정하는 가장 큰 까닭은 “풀꽃도 짐승의 숨결도” 그 길로 인해 사라져가고 있으며 “산모퉁이도 으깨어져 신음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인간의 길은 자연을 파괴하거나 혹은 반(反) 생명적인 길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러나 그 같은 ‘큰 담론’을 담론의 차원에서만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의 참된 깨달음은 발이 곧 길이며, 따라서 발을 씻는 것은 잘못된 길을 씻는 것이라는 데 있다. 발을 씻는 것은 “먼지나 땀”을 씻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여태 남겨진 나의 흔적”을 씻는 것이다. 일종의 정화(淨化)이며 “두 발이 저지른 길을 대신 지워주는 의례”인 셈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지상에서 가장 큰 경의가 당신의 발을 씻겨주는 일”이라고. 지극히 아름다운 탁족도(濯足圖)의 한 풍경이 태어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시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 생각해보면, 발이 곧 길이라는 시적 인식은 길에 관한 시들의 세계에서는 그리 낯설지 않은 인식이다. 그래서 무언가 조금은 아쉽다. 집시의 상식은 넘어섰지만, 길의 상식으로부터는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고나 할까? 조금 더 가 볼 수는 없을까?

3.

다음의 시는 최근에 읽은 시 중에서, 과장 섞어 말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에 대한 시이다. 생각하건데, 시인이 시로써 만들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미로는 그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면 길이 사라져버리는 미로다. 미로는 길이 많은 그 무엇이 아니라 길이 없어지는 그 무엇이다. 시의 미로는 그래서 늘 다시 만들어져야만 한다.

뒷집 조성오 할아버지가 겨울에 돌아가셨다
감나무 두 그루 딸린 빈집만 남겨두고 돌아가셨다

살아서 눈 어두운 동네 노인들 편지 읽어주고 먼저 떠난 이들 묏자리도 더러 봐주고 추석 가까워지면 동네 초입의 풀 환하게 베고 물꼬싸움 나면 양쪽 불러다 누가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심판봐주던

이 동네의 길이었다, 할아버지는
슬프도록 야문 길이었다

돌아가셨을 때 문상도 못한 나는 마루 끝에 앉아, 할아버지네 고추밭으로 올라가는 비탈, 오래 보고 있다

지게 지고 하루에도 몇번씩 할아버지가 오르내릴 때
풀들은 옆으로 슬쩍 비켜앉아 지그재그로 길을 터주곤 했다
비탈에 납작하게 달라붙어 있던 그 길은 여름 내내
바지 걷어붙인 할아버지 정강이에 볼록하게 돋던 핏줄같이 파르스름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비탈길을 힘겹게 밟고 올라가던
느린 발소리와 끙, 하던 안간힘까지 돌아가시고 나자
그만

길도 돌아가시고 말았다

풀들이 우북하게 수의를 해 입힌 길,
지금은 길이라고 할 수 없는 길 위로
조의를 표하듯 산그늘이 엎드려 절하는 저녁이다

-안도현 <조문> 전문(『간절하게 참 철없이』 창비)

글_ 북리뷰어 김용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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