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기쁨 <55> 붉은 고추와 같이 자란 와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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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호 35면

칼라브리아 와인의 명성을 세계에 알린 니코데모 리브란디.

기원전 8세기 그리스 왕이 칼라브리아 식민 활동을 시작하면서, 장화 모양의 이탈리아 반도 발끝 부분에 위치한 작은 항구 도시 치로는 이오니아 해안에서 가장 주요한 그리스 식민지로 발전했다. 그리스 왕의 업적과 이곳 사람들의 뛰어난 와인 양조 기술로 칼라브리아는 ‘에노트리아(와인의 대지)’라 불리게 됐다. 로마 시대에는 올림픽 경기 승자에게 치로에서 만든 와인을 대접했을 정도로 치로 와인의 명성은 유럽 전체에 퍼지게 됐다. 그러나 그 후 로마, 스페인, 프랑스의 지배를 차례로 받으면서 치로는 하나의 작은 항구 도시로 몰락했다.

와인으로는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산지 칼라브리아에서 형 안토니오와 함께 리브란디사(社)의 실질적인 운영자로 재배와 양조를 맡고 있는 사람은 동생 니코데모 리브란디다. 약간 뚱뚱한 몸집과 백발에 안경을 쓴 그의 외모는 전형적인 남부 이탈리아 아저씨다. 하지만 남부 사람치고는 드물게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며 일과 연구에 열심인 신사다. 그는 그리스 시대에 들어온 갈리오포 품종으로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매력을 잘 살리기 위해서는 토착 품종을 사용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88년 갈리오포에 국제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을 블렌딩한 ‘그라벨로’를 선보였다. 그때까지 매우 낮게 평가받아온 칼라브리아의 와인이 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저명한 이탈리아 와인 잡지 ‘감베로 로소’가 1989년 빈티지를 최고 명품으로 평가해 와인 업계를 놀라게 했다.

니코데모는 와인 재배와 동시에 올리브·유기농 채소도 기르고, 소·돼지·산양 등 가축도 키운다. 오전에 그의 4륜 구동차를 타고 올리브와 포도밭, 채소밭이 있는 기복이 심한 구릉을 부지런히 둘러본 우리는 건설 중인 게스트 하우스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침에 짜서 만들었다는 부드러운 리코타 치즈, 밭에서 금방 따온 완두콩과 치커리, 집에서 만든 살라미 소시지가 식탁에 올랐다. 여기에 돼지고기·회향·소금·스파이스·붉은 고추로 만든 이 지방 특유의 아주 매운 향신료를 곁들여 먹었다. “너무 매워, 물 좀 주세요!”라고 얼굴을 잔뜩 찌푸리자 니코데모가 “이걸 마셔요”라며 그라벨로를 내밀었다. 와인을 받아 들고 정신없이 입 안에 부어 넣자 신기하게도 얼얼했던 입천장이 시원해졌다. 그리고 향신료의 매운맛 뒤에 숨어 있던 채소와 리코타 치즈의 단맛이 고개를 내밀었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절묘한 맛의 조화였다.

여러 차례 담백한 채소와 리코타 치즈에 매운 향신료를 발라 그라벨로와 함께 맛봤다. 나도 모르게 멋진 조화를 이룬다는 뜻의 “론도!”를 외치고 말았다. “이 포도와 붉은 고추는 오래전부터 같은 산지에서 자랐어요.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칼라브리아 땅에서 자랐으니 맛이 조화를 이루지 않을 수가 없죠.” 니코데모가 말했다. 붉은 고추 요리와 와인이 이루어내는 새로운 마리아주의 발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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