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롱화의 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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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롯데백화점은 최근 봄 상품 개편 때 서울 잠실·영등포점의 살롱화(소비자 주문대로 만들어 주는 수제화) 매장 19개를 내보냈다.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살롱화 매장이 퇴출된 것은 유례가 없다. 게다가 살롱화는 이 백화점 여성구두 중 가장 잘 팔리는 품목이다. 지난해 여성구두 매출 51%를 살롱화에서 올렸다. 백화점 측이 밝히는 퇴출 원인은 디자인 베끼기. 양병조 구두 바이어는 “자칫하면 백화점 이미지를 망치겠다는 판단에서 내린 조치”라고 털어놓았다. 그 자리에 디자인이 독특한 해외 직수입 구두와 디자이너 브랜드가 들어왔다. 현대·신세계 백화점도 가을 개편 때 살롱화 비중을 축소할 계획이다. 현대백화점 김선형 바이어는 “살롱화가 잘 팔리긴 하지만 컨셉트와 디자인이 천편일률적이어서 다양한 소비자를 끌어들일 수 없다”고 설명한다.

◇3~4일이면 똑같은 물건 생산=“선의의 경쟁이 사라진 지 오랩니다. 남의 디자인을 베껴놓고 그 제품을 세일까지 하니까요.” 대형 백화점에 20여 개 매장을 둔 살롱화 ‘메쎄’의 박세영 이사의 지적이다. 업체들이 계절별로 내놓는 신제품은 보통 100~200여 가지. 그는 “계절이 끝나갈 무렵에 보면 매장마다 적게는 20%, 많게는 절반 정도가 카피 제품”이라고 밝혔다.

정상적인 신상품은 디자이너 손에서 탄생하지만, 카피 제품은 영업사원의 손에서 만들어진다. 옆 가게에 잘 팔리는 제품이 있으면 그를 베껴 그리거나 아예 구매해 디자인실에 보내며 제작을 주문한다. 구두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3~4일. ‘탠디’의 송준길 영업차장은 “잘 팔린다 싶으면 일주일 안에 백화점 모든 매장에 똑같은 구두가 깔린다”고 설명했다.

왜 이렇게 베끼기가 활개를 칠까. 박세영 이사는 “디자인 인력이 부족한 영세업체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연매출이 120억원인 메쎄의 디자이너는 5명. 디자이너가 두세 명에 불과한 업체도 많다고 귀띔한다. 백화점의 매출 압박도 원인이다. 한 백화점 구두판매사원은 “매출이 떨어지면 쫓겨날까봐 잘 팔리는 디자인을 베끼는 건데, 이젠 그것 때문에 쫓겨나게 됐다”고 말했다.

◇업계의 경쟁력 약화=살롱화 업계에 특히 베끼기가 심한 것은 주문생산 시스템 때문이다. 살롱화는 신상품을 개발하되 고객의 발 모양과 취향에 맞춰 구두를 맞춤 제작한다. 재고를 줄이고 손님의 요구를 100% 만족시키기 위해서다. 재고가 없으니 원래 신상품을 포기하고, 옆 가게 신발을 베껴 내놓기도 쉽다. 의류업계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신세계백화점 관계자는 “‘유행을 반영한다’는 명목으로 계절 중간에 다른 브랜드 제품을 베껴내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귀띔했다.

디자인 도용에 앞장서는 것은 대부분 영세업체들이지만, 결국은 업계 전반의 디자인 경쟁력 약화로 이어진다. 영세업체에 당한 대형업체들도 디자인 도용에 무감각해지고, 디자인 인력을 줄이는 경우도 많다는 것. 신세계백화점 구두 바이어는 “업체 간 디자인 경쟁이 없으니 과감한 실험도, 발전도 없어진 지 오래”라고 꼬집었다.

임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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