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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손길로…] 2. 김신아 장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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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김신아(中) 장로가 우석만(右).박연규 목사와 희망을 이야기 하고 있다.

지난 10일 충북 청원군 부용면 충광농원 요양원에선 세 사람이 둘러 앉아 눈물의 기도를 드렸다. 김신아(80)장로를 가운데 두고 충광교회 전.현직 목사인 박연규.우석만씨가 마음을 모았다. 그들은 진정 가난한 이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기원했다. 좌절과 실의에 빠진 농장 사람들이 희망을 되찾게 해달라고 '아멘'을 합창했다.

그들의 얼굴은 밝았다. 속은 바짝바짝 탔지만 겉은 평화를 잃지 않았다. 김장로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틀림없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오랜 세월 단련된 심지가 그대로 전해졌다. 부드러운 듯 강한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전형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충광농원은 1977년 한센병(나병) 환자들이 모여 일군 신앙공동체다. 7~8가구가 텅스텐 폐광 자리를 개척하기 시작해 지금은 53가구 150여명으로 성장했다. 대문도, 범죄도 없는 '청정마을'이다.

농장은 지난주 100년 만의 폭설로 쑥대밭이 됐다. '예수 믿고 축산하여 잘 살아보자'를 모토로 그간 정성을 쏟아부었던 농장이 폭삭 주저앉았다. 충북 최대 규모로 키웠던 닭 60만마리 중 절반가량이 피해를 보았다. 오죽하면 농장 입구에 '살아있는 닭 무료로 드립니다'는 현수막까지 걸었을까. 닭을 굶어죽이기보다 이웃에 나눠주는 게 낫다는 것이다.

김장로는 충광농원의 산증인이다. 중학생 때 한센병에 걸려 전국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이곳을 평생의 일터로 만들었다. 정부 지원 없이 오직 자활.자립의 의지로 사회의 냉대.편견을 견뎌냈다. 그 결과 충북 최대의 양계 농장으로 키워냈으나, 이번에 엄청난 천재(天災)를 당한 것이다.

"웬만한 일에는 충격을 받지 않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라요. 정말 아무 것도 없이, 열심히 살아왔는데…. 잘못된 자식을 둔 부모 심정이 이럴까요. 그래도 하나님의 뜻은 있을 겁니다. 착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거든요."

김장로는 서른에 눈마저 잃었다. 수은이 든 약제를 민간요법으로 잘못 썼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악조건에서도 호미.괭이로 흙과 돌을 고르며 한해 한해 농장을 키워왔다. 어려서부터 좋아한 음악, 남을 배려하는 포용력, 기독교 집안에서 익힌 굳은 신앙으로 주변을 격려하며 모범적 공동체를 세운 것이다.

"절망한 적도 많았습니다. 겨울철 해인사 골짜기에서 담요 한장으로 밤을 새운 적도 있어요. 하지만 '너희는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이란 말씀에 힘을 얻었습니다. 겉모양이 어떻든 제 안에는 빛이 될 수 있는 고귀한 바탕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는 겸손했다. 충광농원의 오늘을 목사의 공으로 돌렸다. 어린 자녀를 데리고 농장에 와 동고동락한 성직자가 있었기에 농장이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자신을 부각하면 곤란하다는 것. 곁에 있던 우석만 목사가 "그만 띄우세요"라며 계면쩍게 웃었다.

"우리들은 몸으로 작품을 쓰는 사람들입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닭을 먹이고, 돼지를 돌보며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려고 땀을 흘려왔습니다."

그는 외지인이 닭을 가져간다는 소식에 "닭이 며칠간 굶었으니 사료를 좀 먹이면 맛이 훨씬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축사가 다 무너졌는데도 이런 말이 나올까. 그는 "비단의 날줄과 씨줄처럼 세상은 서로 얽히며 조화를 이룬다"고 확신했다. 043-275-5011.

청원=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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