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노트북을열며

일그러진 대학 스포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그랬던 이호성이 3월 9일 한강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떠올랐다. 그는 네 모녀를 잔혹하게 살해한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수배를 받고 있었다. 명문 고교-대학-프로팀을 거친 선수의 비참한 최후는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87년 정재용이라는 학생이 연세대 체육교육과에 입학했다. 중학 1학년까지 축구선수였던 그는 수업을 전폐하고 운동만 하는, 이유 없이 가혹한 매질을 당하는 축구부를 뛰쳐나와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KBS에 스포츠 기자로 입사한 그는 뒤틀린 한국 스포츠를 바로잡겠다고 나섰다. 지난해 ‘죄송합니다. 운동부입니다’라는 제목의 시사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연세대 농구 선수들이 수업에 모두 참가한 뒤 훈련하는 모습을 1년 내내 카메라에 담았다. ‘공부하는 운동선수 만들기’의 첫걸음이었다. 그는 최근 스포츠계의 성폭력 실태를 고발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지난주 연세대 농구부 김만진 감독을 만났다. 전주고를 맡고 있던 그는 지난해 모교 사령탑에 올랐다. 연세대는 고려대와의 정기전에서 2연패당하고 있었고, 뛰어난 선수들이 졸업해 전력도 강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김 감독은 정 기자의 제안을 덜컥 받아들였다. 김 감독은 “누군가는,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성적 부진으로 나가라고 하면 언제든 옷 벗을 각오는 돼 있다”고 말했다. 연세대는 지난해 정기전도 져서 3연패당했고, 대학 대회에서도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선수들도 허덕거렸다. 전혀 기초가 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대학 수업을 따라가기가 힘겨웠고, 오후와 밤, 때로 새벽에도 이어지는 훈련을 소화하는 것도 벅찼다. 그렇지만 2년째를 맞으면서 선수들도 서서히 적응하고 있고,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를 깨달아가고 있다. 김 감독은 “스타들을 배출해 온 연세 농구의 명성이 다소 가려지더라도 운동과 학업을 병행하는 게 맞다. 선수들도 10년 후 우리의 판단이 맞았다고, 감사하다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호성보다 조금 일찍 대학을 다녔던 나는 우리 학과로 입학했던 한 운동부 친구를 기억한다. 그는 가끔 들어오는 강의 시간에 맨 뒷자리에 앉아 졸거나 다른 책을 읽었다. 시험 때는 답안지에 이름만 적거나, 옆자리 친구의 도움(?)으로 몇 글자 끼적거린 뒤 가장 먼저 나갔다. 품성이 착하고 순진했지만 그런 상황에서 학과 동료와 어울릴 수는 없었다.

이호성도 그랬을 것이다. 그는 밤낮없이 야구 방망이와 씨름했지만 전공과 교양을 쌓을 기회는 전혀 없었다. 사회와 소통하는 방법도 서툴렀을 것이다. 선수 시절에 그에게 접근했던 사람들은 그를 이용했다. 사업에 실패한 이후 그는 스스로를 망가뜨렸다. 그나마 대학을 졸업하고도 프로나 실업팀에 가지 못한 수많은 선수 출신들은 뒤늦게 인생의 방향을 틀기 위해 얼마나 힘겨운 시간을 보냈을까.

이호성을 비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그도 이 땅의 대학 스포츠가 키워낸 ‘일그러진 영웅’일 뿐이다. 더 이상의 이호성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대학 선수들은 반드시 수업을 들어야 하고, 기초 실력이 떨어지는 이들을 위한 맞춤형 강의도 제공돼야 한다. 무엇보다 기본 학력을 갖추지 않으면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대학에 입학할 수 없게 규정을 고치고, 이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

삼가 억울하게 희생된 네 모녀와 고(故) 이호성 선수의 명복을 빈다.

정영재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