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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속 모습’ 보는 사진작가 송정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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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호 08면

최근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인 김홍업 의원을 촬영했다. 작업은 예상외로 까다로웠다. 성격 탓인지 김 의원이 좀체 웃지 않았다는 것. 굳은 얼굴을 홍보물에 실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김 의원의 결혼을 비롯한 일상생활을 화제로 올려 얼굴을 밝게 만들었다. 결국 미소 짓는 표정이 렌즈에 잡혔다.

“토론하다 화장 고친 MB, 정동영은 계단 100번 왕복”

수많은 정치인을 만났지만 가장 사진에 공을 들인 인물로 기억되는 사람은 정동영 전 장관이라고 한다. 대학 졸업 후 시사지 사진기자를 잠깐 했던 송씨는 “96년 1월 정 전 장관을 찍은 일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이 일에 뛰어들게 됐다”고 말했다.

최정동 기자

당시 총선을 앞두고 쌀쌀한 날씨 속에 이뤄진 촬영은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에서 진행됐다. 오랜 기자생활을 접고 정치권 진출을 결심한 정 전 장관은 수첩을 들고 뛰는 역동적인 취재 장면을 담고 싶어 했다. 만족스러운 한 컷을 얻기 위해 정 전 장관은 전쟁기념관 계단을 100번 이상 오르락내리락했다. 와이셔츠 바람이었는데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래도 정 전 장관은 아무런 불평 없이 열심히 지시에 따랐다.

후보자가 활짝 웃는 얼굴을 앞세운 것도 당시로선 드문 시도였다. 정 전 장관의 환한 표정이 호평을 받으면서 이후 엄숙한 얼굴 일변도의 정치인 포스터가 많이 밝아졌다.

송씨는 “정 전 장관은 사진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겠다는 의지가 뚜렷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그에게 독특한 경험을 선사한 또 한 사람은 문국현 창조한국당 대표. 2004년 유한킴벌리 사장이었던 문 대표는 촬영 일정을 잡으면서 분 단위 스케줄을 제시해 인상이 깊었다고 한다. “1시57분 촬영에 들어가 2시14분까지 찍은 다음, 17분부터 미팅에 들어갔다가 회의 후 다시 촬영하자”는 식이었다는 게 송씨의 기억이다.

국회의원 시절의 노무현 전 대통령을 촬영했던 일 또한 생생하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송씨는 “유명인을 찍어 오라”는 숙제를 하기 위해 ‘청문회 스타’였던 노 전 대통령을 무작정 찾아갔다. 송씨는 “노 전 대통령이 일절 미디어에 나서지 않을 때여서 허락해줄까 싶었는데 학생이라고 하니 의외로 쉽게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처음에 “정치를 반대한 아내(권양숙 여사)에게 외부인을 집 안에 들이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가정생활은 못 찍는다”는 단서를 달았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은 “결혼할 때의 계획은 이맘때쯤 부자가 돼 요트를 타고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었는데…”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송씨는 노 전 대통령을 밤늦게까지 자택 앞에서 기다려 설득한 끝에 촬영 허락을 받아냈다고 한다.

지난해 12월 대선 이틀 전 막판 유세를 위해 KTX를 탄 이명박 대통령을 찍었을 땐 촬영 직전까지 참모들과 열띤 전략회의를 하던 이 대통령 모습이 인상 깊었다. 토론 중이던 이 대통령은 화장을 고친 후 촬영에 임했다고 한다.

사진 찍고 나면 당락 알아

누구보다 후보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며 살아온 송씨는 그들의 얼굴에서 정치적 가능성을 점쳐 보기도 한다. 그는 “후보의 사진을 찍고 나면 그 사람의 당락이 대충 짐작이 가더라”며 “그 적중률이 꽤 높다”고 말했다. 송씨의 이러한 예측은 육감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사진작가의 역할 중 하나는 후보의 약점을 커버하는 일. 그러다 보니 캠프에서 후보의 처지와 경쟁력에 관한 사안들을 솔직하게 제공한다. 이런 정보와 감(感)이 합쳐져 점쟁이 뺨치는 예측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정치인의 개인생활 면모를 엿보는 것도 그의 특권 중 하나다. 사진촬영을 위해 후보의 집을 찾아가 직접 옷까지 골라주는 일이 왕왕 생긴다. 특히 임채정·유인태 의원의 경우 옷장이 너무 초라해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가 꼽는 이미지 정치의 최고봉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선글라스 낀 사진과 막걸리 마시는 모습, 벼 심는 모습, 이 세 가지 이미지로 18년간 국가를 통치했다”는 것이다. 송씨는 “권위주의 시대의 전형인 이 같은 선거사진들을 대중친화적이고 캐주얼하게 변화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자부심을 갖는다”고 밝혔다.

술 오른 얼굴 때문에 곤욕도

2002년 지방선거에 출마한 한 광역단체장 후보는 기자들과 폭탄주를 마시고 촬영장에 나타나는 바람에 난감한 상황이 연출됐다. ‘IMF 사태’를 극복한 진지한 이미지를 담아야 하는데 얼굴에 술이 잔뜩 올라 2시간 넘게 촬영하고서야 겨우 한 컷을 얻었다.

같은 선거에 나섰던 고건 전 서울시장은 일정이 빡빡하다며 5분 만에 촬영을 끝내기도 했다.

98년 지방선거에 출마한 최기선 전 인천시장은 양쪽 눈 크기가 유달리 차이가 나는 경우였다. 최 전 시장은 “아침에 컨디션이 좋으면 크기 차이가 덜 나니까 아침에 일어나 상태가 좋으면 연락을 주겠다”고 해 서너 번 시도한 끝에 만족스러운 사진을 얻었다.

송씨가 보통 한 명의 후보를 촬영하는 횟수는 1000장 정도. 셔터도 수명이 있어 선거 때마다 새것으로 교체한다. 사진촬영은 보통 꼬박 하루가 걸리지만 요즘 같은 성수기엔 의뢰가 밀려 3~4명을 소화하는 날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송씨처럼 여러 정치인이 몰리는 작가는 5명 안팎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향후 정치사진 트렌드에 대해 “이제 덜 웃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유를 묻자 “요즘은 다들 웃으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는 “후보자들이 앞으로는 좀 더 책임감과 무게감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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