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week& cover story] 전용극장 생기는 동춘 서커스단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3면

▶ 김영희 곡예사가 의자 열개를 쌓아올린 뒤 한팔로 균형을 잡고 있다.

시간이 멈춘 세상에 온 듯하다. 경기도 부천 드라마 '야인시대' 촬영장 옆의 동춘 서커스단(www.circus.co.kr). '라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 등 흘러간 가요가 아련한 옛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낸다. 빛바랜 빨강.파랑.흰색 세로줄 무늬 비닐 천막 틈으로 햇빛도 들어오고 얼음바람도 불어온다. 주말이지만 손님은 스무 명도 채 안 된다. 춘삼월에 내린 100년 만의 폭설로 되돌아온 겨울 추위 때문이다. 공연 시작 전, 낼름낼름 장작을 삼키는 대형 페치카 앞에서 관객들은 후루룩 컵라면을 들이켠다.

드디어 공연 시작. 마술.외발자전거.줄타기.공중그네.텀블링.방석돌리기.오토바이 줄타기 등의 묘기가 펼쳐진다. '저들이 올림픽에 나가면 금메달은 떼어논 당상일 것 같다…' 감탄하며 구경하다 보니 뭔가 이상하다. 한국인 곡예사는 몇 보이지 않는다. 공연의 8할은 중국 기예단 몫이다. 신입 곡예사가 들어오지 않은 지 10년이 지났다. 가장 어린 곡예사 김미영씨도 우리 나이로 벌써 스물이다. 이제 한국인 곡예사는 10명이 채 안 된다.

이들이 곡예사가 된 곡절은 비슷하다. 먹고 살기 어려운 가정 형편. 마침 동네로 흘러들어온 서커스단. 매일 같이 찾아가 구경한다. 누군가가 다가와 "먹여 주고 재워 줄 테니 서커스 배울래?"라고 묻는다. 고개를 끄덕이고 유랑 생활을 시작한다. 나무를 타고 놀던 어린 시절, 적성이나 재능을 따질 필요도 없었다. 열살 때 서커스를 시작한 김미영씨는 "입단 이틀 만에 무대에 올라 텀블링.항아리에 들어가기 등의 묘기를 보여줬다"고 말한다.

한 곳에 짧으면 1주일밖에 머물지 않는 생활. 이들은 "독도 빼고 다 가봤다"며 웃는다. 남들처럼 사회생활을 못하니 숫기도 떨어진다. 김동기(22)곡예사도 인터뷰 내내 등을 보이고 앉아 가끔 슬쩍슬쩍 고개를 돌리며 답했다.

"옛날엔 마음대로 밖에 나가지도 못했어요. 지금은 자유죠."

공연이 없으면 단원들이랑 PC방도 가고 술도 마신다. 어릴 때는 책가방 메고 학교 가는 또래들이 부러웠다. 그러나 지금 생활에는 만족하고 있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묘기는 '날아다니는' 공중 재주.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데 사람인들 실수가 없을까. 상처를 입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무서움과 두려움은 순간일 뿐, 금세 무대 위를 난다.

"공중 곡예를 하면 기분이 짜릿해요. 손님이 없으면 재미없지만…."

올 들어 추운 날씨 탓에 손님이 유난히 적었단다. 동물 묘기가 주특기인 김영희(39.여)곡예사는 겨울이 더 원망스럽다.

"강아지들 감기 걸릴까봐 털도 못 깎아줘요. 여건만 되면 외국 서커스단처럼 사자고 호랑이고 깨끗하게 키워 훈련시킬 수 있는데…."

지난해 봄에는 한 공연에 손님이 2000명 가까이 들어설 정도로 호황이었다. 서커스는 날 좋은 봄.가을이 제철이다. 곡예사들은 기본급에 공연 일수만큼 추가 일당을 받는다. 공연 횟수가 줄어드는 겨울엔 자연히 주머니도 가벼워진다.

곡예사들은 "난방이 제대로 안 되니까 추울 땐 손님들한테 보러 오라기도 미안하다"며 겸연쩍어 한다. 그래서 부천시가 2005년 건립할 예정인 서커스 전용 극장을 봄날 기다리듯 고대하고 있다.

전용 극장이 선다 해도 유랑이 완전히 끝나는 건 아니다. 지금처럼 두세 팀으로 나눠 지방 순회공연도 벌일 계획이다. 그러나 최소한 겨울에 전용 극장으로 합류하면 지금 같은 추위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 서커스단 옆의 드라마 '야인시대'세트장과 패키지로 묶어 찾아올 관광객 수요도 상당하리라는 계산이다.

극장만 들어서면 곡예사들은 사계절 내내 봄날일까. 한국 곡예사의 절대 수가 부족한 게 가장 큰 문제다. 김영희씨는 공중 그네.줄타기.동물 묘기 등 못 부리는 재주가 없다고. 그러나 곡예사 수가 너무 적어 지금은 혼자 하는 재주 세가지 정도만 선보이고 있다. 처음 푹 퍼진 아줌마 몸매를 한 그녀가 무대에 섰을 때는 '곡예사 맞나?'란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막상 공중에서 손을 놓고 그네 위에 서서 균형잡는 모습을 보고 경륜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혼자서야 별 생각 다 하죠."

만족하지 못하는 건 욕심이 많아서이기도 하다. 그녀의 곡예 인생은 쉬 끝날 것 같지 않다. "50~60세가 돼도 동물 묘기는 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아들이 원한다면 곡예를 가르칠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아이가 공부를 택했다고.

문세진씨는 네살 된 쌍둥이 딸들에게 곡예사 인생을 물려줄 생각이다. 한국인 곡예사가 드문 만큼 희소가치가 높을 거라는 판단에서다. 그의 딸들은 벌써부터 허리 꺾기.물구나무 서기를 하며 논다.

"중국인들의 기교는 화려해 보이지만 대부분 땅에서 부리는 재주예요. 한국 곡예는 주로 공중에서 벌어지고 더 아슬아슬하죠. 곡예를 배울 어린아이 대여섯명만 있으면 잘 키워서 세계 무대에 내놓을 수 있을 텐데…." 이들의 꿈은 드넓은 세상을 달리고 있었다.

부천=이경희.김필규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