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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속 6㎞의 행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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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거침없이 걸어라』를 다시 읽었다. 지난해 7월, 그러니까 그가 ‘대신(大臣)’에 오르기 전에 낸 책이다. 관료 유인촌이 아닌 자연인 유인촌이 들어 있다. 스타 배우 유인촌의 집념과 철학도 엿볼 수 있다. 책은 걷기 예찬론이다. 2006년 11월 일본대 예술학부 객원연구원으로 초청받아 일본에 온 그가 도쿄의 거리거리를 8개월간 누비며 체득한 걷기의 행복을 풀어놓았다. 소문난 ‘걷기광(Walkaholic)’인 그의 면면을 잘 보여준다.

“시속 6㎞. 나는 그 속도로 걸으며 또 다른 세상과 만났고,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행복을 발견하게 됐다.”

유 장관은 시인 박노해가 들려준 ‘인디언 이야기’도 인용한다. 아메리칸 인디언은 사냥감을 쫓다가도 어느 순간 추격을 멈추고 잠시 뒤를 돌아본다는 것. 너무 빨리 달리면 내 영혼이 ‘나’를 쫓아오지 못하고 길 위에서 헤맬 수도 있기 때문이란다. 그는 걷기를 시작한 후 저만큼 뒤처진 영혼을 기다려 주는 여유가 생긴 것 같다고 적었다.

그런 유 장관의 ‘거침없는’ 언사가 요즘 논란이다. 노무현 정부 때 임명된 문화부 산하기관장들의 자진 사퇴를 주장하고 나섰다. 당사자들이 거부할 경우 그들이 재임기간 중 일으킨 문제를 명시하겠다는 ‘위협’까지 서슴지 않았다. 당사자 일부는 손을 들고 나갔고, 야권과 시민단체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문화계 내부의 철 지난 ‘진보-보수’ 갈등이 재연됐다.

유 장관의 최근 행보는 그가 설파한 ‘시속 6㎞의 행복’과 거리가 먼 것 같다. 배우 유인촌과 장관 유인촌의 소임이 하늘과 땅만큼 다르겠지만 그래도 ‘과속’에 대한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문화·체육·관광, 또 국가홍보라는 방대한 영역을 지휘하는 문화부 수장의 ‘고고성(呱呱聲)’으로 적당하지 않았다. 3류 정치인의 ‘고고성(高高聲)’에 가까웠다. 그사이 우리 문화콘텐트를 세계 5위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그의 원대한 구상은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유 장관은 일본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다. 가장 상징적인 게 ‘약속을 기반으로 한 철저한 신뢰’를 지키는 일본 사회다. 그는 소소한 먹거리부터 국가행정까지 일본의 밑바탕에 깔린 신뢰를 부러워했다. 그의 무대예술 30년도 대사·호흡·동작 등 배우와 스태프 사이의 약속을 지키는 것과 다름없다고 요약했다.

그렇다면 아무리 노무현 정부 사람들이라도 임기가 정해진 산하기관장들의 퇴장을 요구하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악법도 법’이라던 소크라테스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법과 원칙의 준수를 누누이 내세워 온 이명박 실용정부의 노선과도 상충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시간이 조금 흐르면, 시속 6㎞ 속도로 걸으면 전 정권의 ‘코드 인사’는 자연스럽게 풀릴 문제가 아닐까 싶다. 미운 아이에게 떡 하나 더 주고, 미운 사람에게 쫓아가 인사한다는 게 우리의 지혜가 아니었던가. 상상력과 관용을 먹고 사는 문화·예술의 정체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유 장관은 지난달 27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로 연극 ‘돈키호테’를 인용했다. 책에도 같은 구절이 나온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싸워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다. 그렇다. 꿈과 싸움은 예술가의 본령이다. 하지만 장관의 싸움은 현실적이어야 한다. 돈키호테의 일방적 돌진은 되레 상대 진영을 뭉치게 한다. 갖은 이해가 엇갈리는 21세기의 싸움을 헤쳐가는 무기는 ‘타자(적)에 대한 상상력’이 아닐까. 유 장관도 책에서 “자신의 가치관과 다른 것을 받아들이는 넓은 마음”을 역설했다. 그의 성숙한 ‘정치 연기’를 기대하게 하는 대목이다.

박정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