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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의 굴욕 … “도대체 환율 꼭짓점 어디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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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흐름이 크게 달라진 건 없다. 미국의 신용경색, 외국인 투자자금의 이탈, 국내 수급악화, 경상수지 적자…. 최근 1~2주 사이 원화 환율을 밀어 올린(원화가치 하락) 요인은 그대로다. 여기에다 베어스턴스의 부실화라는 미국발 악재가 보태져 환율은 지난주보다 훨씬 가파르게 올랐다. 이 때문인지 17일 금융회사 외환시장 담당자들이 내놓은 분석도 베어스턴스의 영향을 제외하고는 지난주와 대동소이했다.

문제는 시장 심리다. 앞으로 환율이 더 오를 것이라는 기대감이 시장에 퍼지면 환율은 정말 올라가는 법이다. 투기 자금 등 가수요가 겹쳐 수급 사정이 더욱 나빠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3~4월은 외국인 주주들에게 배당금을 지급하는 시기다. 계절적으로 달러에 대한 수요가 커지는 때다.

환율이 더 오를 것이라는 기대심리가 점점 커짐에 따라 달러당 1000원대를 훌쩍 넘은 환율은 당분간 다시 밑으로 내려오기는 쉽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한·미 금리격차가 더 벌어질 전망이지만 이것도 떠나가는 달러를 붙잡지는 못할 듯하다. 물론 외환시장에서는 환율이 워낙 빠르게 급등했으므로 조만간 조정을 받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해외에 돌출변수가 없다면’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윤석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의 신용경색이 더 심해지면 환율이 더 오를 수 있다”며 “해외의 영향 탓에 얼마나 더 오를지 예측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과거엔 환율이 오르면 수출에 유리하다는 게 정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수출품목 가운데 가격으로 승부하는 비중은 점점 낮아지는 추세다. 또 수출상품의 가격이 다소 싸지더라도 세계 경기가 둔화되고, 원자재 가격이 높아지면 수출이 크게 증가하기 어렵다.

그보다는 물가가 크게 뛰어 내수가 위축될 수도 있다. 외채를 쓰고 있는 기업은 빚 부담이 더 무거워진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이날 보고서를 내고 “원화 절하에 따른 무역수지 개선 효과는 미미하고 오히려 부작용이 커질 위험이 있다”고 전망했다.

한은도 수출과 기업 채산성에 미치는 환율의 효과가 외환위기 이후 급격히 약해졌다고 본다. 예컨대 수출기업은 일본에서 수입하는 부품·소재의 가격이 비싸져 원가에 압박을 받기 때문이다. 장광수 한은 조사국 지역경제반장은 “1970~80년대는 환율이 수출을 늘리는 데 큰 영향을 줬지만 지금은 그 효과가 많이 줄었다”며 “수출 대상국의 경기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선 외환 당국이 ‘완력(외환보유액)’을 쓸 만한 여지는 별로 없다. 전문가들은 그럴 필요도 없다고 지적한다. 장재철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환율을 억지로 낮추기 위해 외환보유액을 동원해봤자 효과가 없을 것”이라며 “당분간 그냥 내버려 두거나 구두개입 수준에서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특히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해외변수가 워낙 커지다 보니 외환 당국이 긴급대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주장은 그리 많지 않다. 기업과 전문가들도 일단 관망세다. 모든 게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물경제를 제 궤도에 올려 놓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장재철 수석연구원은 “경기 대책을 차질 없이 수행하는 게 더 급하다”고 말했다. 매일 요동치는 환율의 숫자에 얽매이지 말고 정공법을 쓰라는 주문이다. 현대경제연구원도 “정부는 환율의 경제효과에 대한 전통적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며 “원화 약세 시대를 서비스 수지 적자 해소를 위한 계기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윤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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