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民辯 떠난 자리 市辯이 접수하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중앙SUNDAY
변호사 단체인 ‘시민과 함께 하는 변호사들(시변)’이 새 정부 들어 주목받고 있다. 공동 대표인 이석연·강훈 변호사가 각각 법제처장과 대통령실 법무비서관에 발탁되면서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시변이 노무현 정부 시절 인재 풀 역할을 한 ‘민주 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과 자리를 바꾼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러다 민변 시대가 가고, 시변 시대가 오는 거 아니야?”

“그러게, 시변에 또 누가 있더라?”

이석연 시변 공동대표가 2005년 1월 출범식에서 새 변호사 단체 창립의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강훈 변호사가 7일 법무비서관에 발탁됐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서울 서초동 법조 타운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5일 ‘이석연 법제처장 임명’ 뉴스가 나올 때만 해도 그다지 시변에 눈길이 쏠리지는 않았다. 신행정수도 이전, 국회의원 선거구 획정 등 헌법소원에서 위헌 결정을 이끌어낸 이 변호사는 개인적 지명도가 높은 편이다. 그러나 강 변호사까지 요직에 기용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겹경사를 맞은 시변은 어떤 표정일까. 이헌 사무총장은 “개인적으로는 자격을 갖춘 두 분이 중책을 맡게 돼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단체 입장에선 시변을 이끌던 주춧돌이 모두 빠져버린 셈”이라고 했다. 이 사무총장의 걱정은 그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오해할 소지가 있어 당혹스럽기는 합니다. 이번 경우는 정치와 거리가 멀고, 권력기관으로 간 것도 아닌데….”

시변에서 복잡한 반응을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2005년 1월 출범한 시변은 민변과 대립각을 세웠다.

“기존의 변호사 단체와 관련 인사들이 본연의 임무를 소홀히 한 채 오히려 권력에 앞장서거나 그 속으로 매몰되면서 새로운 기득권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한다. 우리는 그들이 극도로 민감한 정치·사회적 현안에 대해 대다수 변호사의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목소리를 무시하거나 이를 편의적으로 왜곡하여 정치적으로 악용하였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창립 선언문)

당시 민변 인사가 청와대와 정부·국가정보원·국회 등에 대거 포진한 것을 겨냥한 것이다. 실제 노무현 정부 시절 고영구 국가정보원장, 강금실·천정배 법무부 장관, 문재인 대통령 비서실장, 최영도 국가인권위원장, 전해철 민정수석, 김선수 사법개혁비서관 등 민변 출신 변호사들의 기용이 잇따랐다. 노 대통령도 민변 출신이다.

시변 공동 대표를 맡은 이석연 변호사는 “변협이나 민변이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를 소홀히 하고, 이념에 쏠리고, 권력에 흡수되는 현상까지 보여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며 “새 변호사 단체의 출범은 시대적 요청”이라고 강조했다.

발기인 55명, 참여 회원 135명으로 출발한 시변은 같은 해 2월 대한변협 회장 선거에서 민변과 격돌했다. 보혁 구도로 진행된 이 선거에서 보수 진영의 천기흥 후보를 밀어 천 후보가 당선하는 데 한몫했다.

시변은 노무현 정부의 ‘개혁’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과거사법·신문법·사학법·국가보안법 등 4대 쟁점 법안에 대해 보수 단체들과 공동전선을 형성했다.

2005년 진보 성향의 박시환 변호사 등 3명이 대법원 후보에 임명 제청되자 “코드 인사”라며 반대 성명을 냈다. 강정구 교수 사건 때는 불구속 수사 지휘권을 행사한 천정배 법무부 장관의 퇴진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였다. 지난해 기자실 통폐합에 대한 헌법소원도 주도했다.

일반 회원인 하창우 서울변호사회 회장은 “출범 때만 해도 보수 성향의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과 민변 사이에서 실용주의적 중도 노선을 지향한다는 계획이었으나 노무현 정부 비판에 앞장서면서 보수 경향으로 분류됐다”고 말한다.
한나라당과는 가까운 거리를 유지했다. 지난해 8월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는 강

훈 공동 대표와 이헌 사무총장, 정주교 변호사 등 회원 3명이 검증위원으로 들어갔다.

지난해 12월 대선을 앞두고는 회원들이 이명박 후보와 이회창 후보를 놓고 갈리기도 했다. 총괄간사를 맡았던 이두아 변호사가 이명박 후보 인권특보에 임명된 것이 계기였다. 이 변호사가 기자회견에서 “나는 이회창 전 총재의 대선자금을 가장 많이 아는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이회창 캠프에 들어간 이헌 사무총장은 “이두아 변호사는 그럴 위치에 있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이 사무총장은 “좌파 정권을 종식해야 한다는 절박함에 잠시 정치에 관여했던 것”이라며 “개인 차원의 정치 활동일 뿐 시변과는 관계없다”고 강조한다.

시변을 곱지 않은 시각으로 보는 변호사도 적지 않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시변 공동 대표가 정부·청와대로 가는 것을 보면서 그들 스스로가 비판한 정치화·권력화의 길을 걷고 있다는 점에서 실망감이 든다”고 했다. 그러나 시변의 공식 입장은 “법제처장이나 법무비서관 자리는 법률에 관한 전문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법조인이 참여할 만한 공직”이라는 것이다. 민변 출신 인사들과는 참여 대상과 방식이 다르다는 얘기다.

앞으로의 활동 방향에 대해선 “시변 2기(期)를 준비 중이며 지난 10년간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왜곡된 법 제도를 정비하고, 독소를 제거하는 데 전념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변과 또다시 부딪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민변에는 보수정부 출범이 오히려 좋은 계기가 되리라고 봐요. 권력을 비판하고 견제하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으로 믿습니다. 생각이 다른 부분은 선의의 경쟁을 해야겠지만, 법률시장 개방 같은 문제에 대해선 협조를 해 나갈 생각입니다.”(이 사무총장)

현재 시변 회원은 600여 명. 주요 회원으로는 하창우 회장, 방희선 동국대 법대 학장, 오욱환 전 대한변협 사무총장, 이재원 대한변협 북한인권소위원장, 법무법인 한얼 백윤재 대표, 이영희·양소영·이승태·박제형·최문기 변호사 등이 꼽힌다. 이회창 후보 특보로 활동한 전원책 변호사는 운영위원이다. 1988년 출범해 올해 20주년을 맞는 민변과는 참여 인사의 중량감을 놓고 볼 때 차이가 있다.

대한변협 김현 사무총장은 “전체 변호사를 대변하는 대한변협은 가치중립적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고 전제한 뒤 “앞으로도 민변과 시변이 용기 있는 목소리를 내고, 건전한 토론을 통해 우리 사회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권석천 기자

중앙SUNDAY 구독신청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