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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우는 한우마다 1 ++ 특등급 “牛~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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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세에 소 한 마리로 축산업을 시작한 김상준씨. 지금은 2개 농장에 700마리가 넘는 한우를 기르는 부농이 됐다. [정읍=신동연 기자]

선홍빛 살 틈틈이 눈처럼 하얗게 지방이 내려앉은 한우 꽃등심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흐른다. 호주산 등 수입 쇠고기가 밀려들고 있으나 미식가의 눈과 입을 사로잡는 것은 한우다. 소비자들은 한우를 선택하고 싶지만 문제는 가격. 백화점 식품관에서 판매되는 최고 등급의 한우 등심은 100g에 1만2000원을 훌쩍 넘어선다. ‘1++’의 최고 등급은 전체 한우의 7.5%에 불과한 데다, 800㎏이 넘는 소 한 마리를 잡아 봐야 등심 부위는 40㎏에도 못 미치기 때문이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최고 등급의 한우 등심은 가까이 하기 힘든 ‘당신’이다. 반면 한우 농가 입장에서는 가까이 해야 할 대상이다. 등심은 등급 판정사가 소고기의 등급을 판정하기 위해 잘라 보는 첫 부위다. 무게가 800㎏을 넘고 육질이 최고 등급인 한우 한 마리는 1000만원을 호가한다. 모두 5개의 등급이 있는데 등급 하나에 100만원씩 차이가 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이후 소 값 하락과 최근의 사료값 급등이라는 이중고 속에서 한우 농가는 육질의 고급화로 살길을 모색하고 있다. 최고 등급의 한우를 얼마나 많이 생산해 내느냐에 축산농가의 미래가 달려 있다.

전북 정읍에서 한우를 기르는 김상준(52·오성그린농장)씨가 출하하는 한우는 최고 등급 비율이 70%를 넘어선다. 지난해 거세 한우 54마리를 시장에 내놨는데 이 중 38마리가 최고 등급을 받았다. 전국 평균(7.5%)의 10배나 되는 성적이다.

김씨의 비결이 궁금했다. 봄기운이 완연한 12일 전북 정읍시 산매리에 있는 김씨의 농장을 찾았다. 시내에서 북쪽으로 지방도를 따라 10여 분을 달리다 샛길로 빠져나왔다. 황토빛 인삼밭 사이로 난 길 끝에 깔끔한 콘크리트 바닥의 초대형 축사가 나타났다.

“우선 신부터 갈아 신으시죠.” 김씨는 취재진에게 흰색 고무장화를 내밀었다. 소독조에 발을 담근 뒤에야 농장 문이 열렸다. 7920㎡(2400평) 규모의 축사에는 큰 소와 송아지 400여 마리가 모여 있다. 그러나 흔히 축사에서 나는 악취가 없었다. 잘 발효된 곡물 사료에서 풍기는 시큼한 냄새가 전부였다.

송아지가 있는 곳엔 보릿짚, 큰 소 자리엔 톱밥이 깔려 있다. 소에게 일반 볏짚이나 왕겨가 나이론 이불이라면, 보릿짚은 오리털 격이다. 볏짚보다 줄기가 굵은 보릿짚은 공기를 많이 머금어 한결 따뜻하다. 4~5마리 단위로 나뉜 구획마다 자동 항온 급수 장치가 놓여 있다. 계절과 관계없이 큰 소는 섭씨 30도, 송아지는 35도의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맞춰져 있다. 천장엔 선풍기가 달려 있어 환기를 돕는다. 소의 분뇨와 볏짚·흙이 뒤엉켜 섞이면서 흔히 생기는 악취를 전혀 맡을 수 없는 이유다.

김씨는 “소가 스트레스 없는 최상의 조건에서 자랄 수 있도록 환경을 꾸몄다”고 말했다.

그래도 이것만으로 ‘최고 등급의 비결’을 설명하기에 부족해 김씨를 계속 채근했다. 결국 김씨는 “거세한 수송아지에게 총체보리를 주 사료로 먹이면 고기의 육질이 좋아진다”고 털어놨다.

총체보리란 알곡과 줄기·잎이 달린 채 수확한 보리를 말한다. 영양가가 풍부해 소의 성장을 도울 뿐 아니라 육질이 부드럽고 향도 뛰어나다. 20여 년간 농장을 일궈 오면서 터득한 노하우다. 그간 꾸준히 종자 개량을 해 양질의 유전자를 가진 한우만을 골라낸 것 역시 중요한 비결 중 하나다.

이 같은 방법을 통해 김씨 농장의 ‘최고 등급률’은 해마다 급상승했다. 10여 년 전 이미 10%를 기록했고 4년 전 50%를 넘었다. 김씨는 “2년 전 처음으로 70%를 넘어섰다”며 “이제 숫자 싸움을 하는 단계를 넘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최고 등급 한우의 비율이 높아지면서 수익률도 자연스레 올라갔다. 지난해 김씨 농장의 당기순이익은 50%를 넘어섰다. 한우 100마리를 팔면, 50마리 값이 순익으로 떨어진다는 얘기다. 인근 논밭 19만8000㎡(6만 평)를 사들여 사료에 쓸 청보리와 목초 농사를 직접 지은 것도 최근 사료 값 폭등을 이겨낼 수 있는 요인이다.

지금이야 국내 최고 수준의 과학영농으로 무장한 김씨지만 시작은 그렇지 못했다. 김씨는 4남2녀 집안의 장남이다. 20세 때 부친이 위암으로 세상을 뜨면서 모친과 다섯 동생의 생계를 도맡아야 했다. 대전 등 객지에서 외판원 생활도 했으나 체질에 맞지 않았다. 26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소 한 마리로 축산업에 발을 디뎠다. 정읍농고를 졸업한 것이 밑천이 돼 이듬해 농어민후계자로 선정됐다. 시중금리가 22%이던 시절에 5%로 돈을 빌려 소를 20마리로 늘렸다. 5년 뒤엔 100마리, 그리고 또 3년 뒤엔 300마리로 불려 나갔다. 지금은 인근의 제2농장까지 포함, 700마리가 넘는 한우를 6명의 직원과 함께 기르고 있다. 어려움도 많았다. 1985년 ‘소 파동’ 때는 150만원을 주고 산 송아지가 10만원까지 떨어졌다. 외환위기 때를 포함, 최근까지 네 차례 이상 소 값 파동을 겪어야 했다.

김씨는 “20여 년의 고생 끝에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한우를 길러냈다” 며 “머잖아 우리 한우를 미국에 수출하는 날도 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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