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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진지한 성찰 보여준 新무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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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 10면

한성수 작『만검조종』의 삽화. 이미지 제공=청어람

‘한국무협소설’이라는 말은 아직 그 의미가 분명치 않은 말이다. ‘한국판타지소설’이라는 말과 비교해 보면 무엇이 문제인지가 잘 드러난다.

-‘한국무협소설’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판타지소설은 판타지 세계, 즉 현실 세계와는 차원이 다른 가상 세계를 무대로 하는 반면, 무협소설은 현실 세계를 무대로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판타지소설의 가상 세계는 서구의 역사와 문화를 주된 재료로 삼아 상상된 것이기는 하지만 어떻든 실제의 서구 어느 때, 어느 곳을 무대로 하지는 않는 것이고, 이에 반해 무협소설의 무림이라는 세계는 비록 가상의 비현실적·초현실적 요소를 많건 적건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실제의 중국 어느 때, 어느 곳을 무대로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판타지소설은 비서구 지역에서 비서구인에 의해 쓰인다고 해서 별로 이상스럽게 여겨지지 않는 데 반해 무협소설은 비중국 지역에서 비중국인에 의해 쓰이는 것이 다소 이상스럽게 여겨지게 된다.

요컨대 판타지소설은 보편적인 것인 데 반해 무협소설은 중국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한국판타지소설이라는 말은 거의 사용하지 않으면서 무협소설에 대해서만은 굳이 한국무협소설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거기에서 ‘한국적’인 것을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은 그런 생각으로부터 비롯된다.

당겨 말하면, 그런 생각은 옳지 않다. 그런 생각 속에는 자신을 서구라는 타자와 동일시하는 서구 지향적 무의식과 자신을 중국이라는 타자와 구별하고자 하는 민족주의적 무의식, 얼핏 상반되는 것으로 보이는 두 가지 무의식의 공모가 숨어 있다.

이러한 공모는 근대 이후로 너무나 일반적인 것이 되어 그것이 옳건 그르건 별로 낯선 것은 아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문학에 대한 이해 방식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는 점이다. 판단 기준을 서사의 배경에만 두었지 그 문학성에 두지 않은 것이다.

가장 소박한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해 보자. 무협소설은 중국에서 20세기 초 새롭게 형성된 장르다. 그 전에는 무협소설이라는 장르가 없었다. 있었던 것은 무협소설과 일정한 연관이 있는 여러 가지 서사 양식들이지만 그것들을 무협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한국무협소설이라는 것은 바로 그 20세기 이후의 새로운 서사 장르인 중국 무협소설과의 관계 속에서 성립된다. 그런데 그 관계는 몇 가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파악될 수 있다.

1) 한국에서의 무협소설 : 한국어로 번역된 중국무협소설과 한국어로 창작된 무협소설을 모두 포함한다.

2) 한국에서 한국어로 창작된 무협소설 : 중국 작가의 이름을 빌렸지만 실제로는 한국 작가가 창작한 것들도 포함된다. 대체로 1970년대 말 시작되었다고 파악된다.

3) 한국에서 한국어로 창작된 무협소설 중 중국무협소설의 단순한 아류가 아니라 나름대로 독자적인 모습을 갖춘 작품들.

이 중 문제가 되는 것은 3)이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중국무협소설과 구별되는 한국무협소설의 독자성이다. 그 독자성을 어떤 내용과 가치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많은 논의가 가능해진다.

그 독자성이 한국적인 것이기를 원할 때 흔히 얘기되는 것이 시간적·공간적 배경이 한국이고, 인물이 한국인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이 주장에 부합되는 작품들도 있다. 금강의 『발해의 혼』이나 진산의 단편 『청산녹수』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발해의 혼』은 발해를 배경으로, 『청산녹수』는 삼국시대의 신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중국이 배경이면서 한국인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경우는 상당히 많다. 이재일의 『묘왕동주』나 진산의 『대사형』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이 주장이 좀 더 극단화되면 한국무협소설의 원류를 한국의 문학 전통에서 찾고자 하는 보다 급진적인 주장이 나오게 된다. 가령 조선시대의 창작 군담소설이나 『홍길동전』『전우치전』같은 한글 소설, 일제 강점기 홍명희의 『임꺽정』등이 고려된다. 또 근자의 한국소설 중 김병총의 무예소설, 이병천의 『마지막 조선검 은명기』, 유재주의 『검』같은 것들이 한국무협소설의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들에는 흥미로운 점이 있지만, 그러나 미묘한 문제들이 숨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앞의 주장에 대해서는, 배경이 한국이고 인물이 한국인일 경우 그것이 나름대로 한국적인 것의 요소가 될 수 있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중국무협소설로부터 구별되는 독자성이 온전히 확보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배경과 인물이 중국이라고 해서 그 독자성의 확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뒤의 주장에 대해서는, 거기에서 제시되는 작품들은 장르상 무협소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무협소설이라는 것은 20세기 초 일정한 조건 아래 중국에서 생성되어 한 세기 동안 전개되어온 장르인 것이니, 만약 뒤의 주장이 제시하는 작품들과 그 문학적 흐름에 이름을 붙인다면 무협소설이 아니라 다른 어떤 독자적 이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주목하는, 혹은 내게 특히 관심이 가는 것은 한국에서 한국어로 창작된 무협소설 중 중국무협소설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서사문학적 성격을 갖는 작품들이다. 80년대의 이른바 창작무협과 90년대 중반 이후의 신무협이 그것들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긍정적 의미의 문화적 의미가 뚜렷하게 발견되는 것은 이른바 신무협이다.

중국무협소설은 시대적으로 보면 49년 이전의 구파무협소설과 이후의 신파무협소설로 나뉜다. 신파무협소설은 다시 장소에 따라 김용을 대표적 작가로 하는 홍콩의 그것과 와룡생을 대표적 작가로 하는 대만의 그것으로 나뉜다.

한국에서의 무협소설은 60년대에 대만무협소설 번역으로 시작되었고, 70년대 말부터 창작무협, 즉 한국인에 의해 창작된 무협소설이 나오기 시작했다. 무협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해 비판할 때 흔히 운위되는 현실도피니 대리만족이니 하는 성격은 특히 대만무협소설에 강하게 나타난다.

서효원·사마달·금강·검궁인·야설록과 그 밖의 많은 작가가 활동한 80년대 한국의 창작무협은 스타일상으로는 대만무협소설과 구별되는 독특한 모습을 이루었지만, 현실도피나 대리만족이라는 성격에서는 달라진 바가 없었고 오히려 더욱 심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반해 용대운의 『태극문』을 선구로 하고 좌백의 『대도오』를 필두로 하여 90년대 중반 세찬 흐름을 이루며 시작된 한국의 신무협은 현실도피와 대리만족이라는 기존 무협소설의 틀을 초월하거나 전복하고 생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실존적 탐구를 나름대로 의미 있게 수행했다.

일반적 의미에서의 문학적 수준이 놀라울 만큼 향상되었고, 문장이나 문체·내러티브의 측면에서나 사상·세계관의 측면에서나 아주 뚜렷한 독자성을 형성하였으며, 여러 측면에서 근대성과 탈근대성을 지니며 뚜렷한 문화적 동시대성을 보여주었다. 용대운·좌백에 이어 풍종호·진산·설봉·장경, 그리고 임준욱·백야·한상운·이재일·운중행·하성민·한수오·춘야연·금시조·문재천·최후식·유재용·장상수·별도·조진행·송진용·초우·월인·

권용찬 등 수많은 작가가 등장하여 이 주목할 만한 문학적 현상을 활짝 꽃피웠다.
신무협의 이와 같은 독자적인 서사문학적 성격을 ‘한국적’이라는 말로 설명하거나 규정하는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그것은 ‘한국적’인 가치가 아니라 보편적 가치일 것이다. 무협소설 장르 중 특히 한국의 신무협에서 이 가치가 실현된 것은 사실이고, 또 그것이 동시대 한국 문화 및 문학과의 일정한 연관 아래 실현된 것도 사실이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한국적이라는 관형어를 붙이는 데는 나로서는 주저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무협소설의 옹호자가 아니고 한국무협소설의 옹호자도 아니다. 단지 신무협을 비롯하여 내가 거기에서 긍정적인 문화적 의미를 발견하는 무협소설 작품들의 옹호자일 뿐이다. 한국무협소설 중 내가 주목하는 문학적 흐름의 미래가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나를 안타깝게 한다.

어떤 좋은 작가들은 무협소설 쓰기를 중단했고, 또 어떤 좋은 작가들은 무협소설 독서 시장에서 차츰 독자를 잃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행스러운 것은 새롭게 등장하는 작가들 중 신무협의 긍정적 의미를 나름대로 계승·발전시키는 맥락에 있는 경우가 결코 적지만은 않다는 사실이다.


전형준씨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무협소설을 읽어온 무협소설 애호가로 『무협소설의 문화적 의미』『한국 무협소설의 작가와 작품』(서울대출판부)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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