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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Story] 일본, 중앙은행 총재 ‘코드 인사’ 망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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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금융 리더십의 진공 상태’.

중앙은행 총재의 공석을 가리키는 말이다. 나라 경제가 흔들릴 법한 일이다. 그런데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 일본에서 이게 현실화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무토 도시로(武藤敏郞) 일본은행 차기 총재 지명자에 대한 인사동의안이 12일 참의원에서 야당에 의해 부결됐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참의원은 여소야대다.

이에 따라 후쿠이 도시히코(福井俊彦) 현 총재의 임기 만료일인 19일까지 일본 여야가 합의를 보지 못할 경우 일은은 부총재 대행 체제로 들어간다. 가뜩이나 국제 금융시장이 불안한 상태에서 이번 사태는 일본에선 물론 국제적으로도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일본의 야당인 민주당은 무토가 재무성 사무차관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재정과 금융의 분리 원칙이 흔들린다”며 반대해 왔다. 그러나 명분론의 이면에는 다른 법안에서 자민당의 양보를 받아내기 위한 전략이 숨어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물론 자민당이 주도하는 중의원은 13일 정부안대로 무토의 일은 총재 선임을 가결했다. 하지만 양원제의 일본에선 참의원이나 중의원 어느 한쪽이 부결하면 인사안은 백지화된다.

일본 정부는 무토 총재안을 국회에 다시 제출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일본 언론들은 보도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국회에 대한 모독”이라며 강력 반발하면서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총리를 압박하고 있다.

여야의 정면 대치가 이어져 일은 총재가 공석이 되면 여야 모두 정치적 타격을 입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이미 일본의 주요 신문들은 중앙은행 총재 인사를 정치도구로 삼은 민주당을 비판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12일자 사설에서 “민주당의 반대는 무책임하다”고 주장했다.

야당의 반대를 뻔히 알면서 무리하게 인사를 추진한 후쿠다 정부의 지지율도 하락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특히 자민당은 지난해부터 일은이 경기 회복을 추진하는 정부 정책에 적극 협조하라고 압박을 가해 왔다. 관료 출신인 무토를 지명한 것도 그 연장선이었다. 결과적으론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건드리다 정권이 흔들리는 사태를 맞이한 셈이다.

이에 따라 일본 금융계 일각에서는 일은 총재 인사 파동이 외국인 투자자들의 이탈을 가속화해 이른바 ‘3월 위기설’이 촉발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해외 언론의 관심도 높다. 13일자 파이낸셜 타임스는 “중앙은행을 둘러싼 여야의 첨예한 대립으로 일본 지도자들은 향후 과감한 정책을 추진할 힘이 떨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은 이번 사태가 여야의 체면 싸움으로 번져 해결을 어렵게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우리나라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물가가 급등하는 동시에 경기가 식고 있는 상황에서 기획재정부는 경기 회복을 강조하고 한국은행은 물가 안정을 중시하고 있다. 이런 입장 차이가 통화정책 방향과 맞물려 자칫 한은의 독립성 시비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한양대 하준경 교수는 “금리·환율이 요동치는 상황에서 정부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흔들려 할 경우 시장이 크게 불안해질 수 있다”며 “여러 채널로 서로 협조를 구하되 한은법의 취지대로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존중해 주는 게 시장을 안정시키는 길”이라고 말했다.

한편 13일(현지시간) 일본 엔화는 런던 외환시장에서 개장 직후 달러당 99.88엔을 기록, 12년5개월 만에 100엔 밑으로 떨어졌다(엔화 강세). 또 닛케이 평균 주가는 전날보다 427.69 포인트(3.33%) 급락한 1만2433.44로 마감해 지난해 이후 최저가(1만2532)를 경신했다.

남윤호·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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