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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가짜 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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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가짜 약도 네 가지 부류가 있다. 오래된 것부터 보면 첫 번째는 플라시보(placebo)다. 약 성분이 없지만 의사가 줬다는 이유만으로 증상이 나아지는 오묘한 심리치료제다. 흔히 위약(僞藥)으로 번역된다. 서양에선 미라 분말, 당나귀 발톱 등 희한한 것들이 위약의 재료였다. 조선의 의생이 마땅한 약재가 없을 때 한지에 처방약 이름을 쓴 뒤 물에 달여 마시라고 이른 것도 위약이다.

두 번째는 맹물과 다름없는 것을 엄청난 약효가 있는 것처럼 대중을 속인 사기약이다. 1950∼60년대 미국을 출렁이게 했던 가짜 항암제 크레비오젠이 대표적인 사례다. 의사 듀로빅은 이 약이 놀라운 항암효과를 지닌다고 주장했지만,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분석한 결과 크레비오젠엔 광유(鑛油)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다행히 요즘엔 신약 허가 과정이 까다로워져 이런 허풍 약의 등장은 원천봉쇄됐다.

세 번째는 진짜를 흉내 낸 짝퉁 약이다. 최근 국내에서 유통 직전에 적발된 가짜 아모디핀(혈압약)이나, 적발 소식이 끊이지 않는 가짜 비아그라 등이 여기에 속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전 세계 유통 약의 10%, 개발도상국에서 팔리는 4알 중 1알은 짝퉁이라고 발표했다.

네 번째는 가짜 성분이 든 불량 약이다. 최근 미국에서 19명의 사망자를 낸 헤파린(피를 묽게 하는 약), 파나마·아이티에서 약 200명을 숨지게 한 감기약이 좋은 예다. 헤파린엔 불순물, 감기약엔 공업용 글리세린이 들어 있었다.

넷 중에서 플라시보는 먹어도 해가 없다. 유당(알약)·증류수(물약)·생리식염수(주사약) 등 무해한 물질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셋은 생명을 위협한다. 짝퉁 유통률이 53%에 달하는 말라리아약 아르테수네이트는 가짜 약의 위험성·비윤리성을 잘 보여준다. 말라리아로 연간 100만 명이 숨지는데 진짜 약을 사용했다면 20만 명은 구했을 것으로 WHO는 추산한다.

우리 국민이 희생자가 될 가능성도 엄존한다. ‘약이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약을 좋아하는 데다 가짜 약의 천국이자 세계 1위의 약품원료 생산국인 중국이 바로 옆에 있다. 인터넷·암시장 등 유통경로도 확보된 상태다.

역대 9명의 식의약청장 가운데 신임 윤여표 청장을 비롯해 4명이 약대 교수 출신이다. 의료계·식품학계 등에서 불만의 목소리도 들리지만, 국민에게 중요한 건 전공이 아니라 소임을 다하느냐 하는 것일 터. 새 청장은 전공을 살려 가짜 약 사고만큼은 확실히 막아줬으면 좋겠고.

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